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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하루의 얼마를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나요? 니체는 “하루의 2/3를 스스로를 위해 쓰지 못한다면, 이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답니다. 자신을 위해 스케줄을 짜고, 긍정적이고, 너그러우며, 자기를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주인(主人)이 아닙니다. 자유를 누리고 살지 못하면 主人이 아니고,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고 자기 에너지(氣)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主人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지 못한다면 主人이 아닙니다. 늘 배려심을 가지고,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유에까지 신경 써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主人입니다.
누구라도 사람은 게으르며, 귀찮고, 힘든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귀찮고 힘들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심기혈정(心氣血精)을 말하면서, 마음을 알면 에너지는 저절로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알면 에너지는 저절로 얻어진다”는 그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얻었다고 그 운영법이 저절로 숙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밥상이 차려졌다고 저절로 배가 부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경험자는 알고 있듯이, 단지 깨달음을 얻었다(見性)고 에너지를 운영 능력이 보너스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心)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에너지를 다스리려면 통기(通氣), 운기(運氣)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상대(商大) 교수라 할지..
분명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가르침이 있었어도, ‘담박 깨닫는다’고 말하면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각(角)을 잡고 오래오래 앉아 선정(禪定)을 유지해야만 깨달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기 전에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에도 선정(禪定)을 지혜(智慧)보다 앞서서 이야기하고 있고, 지관법(止觀法)에서도 관(Vipassana)의 앞에 지(Samatha)가 자리 잡고 있다고 고집 피우는 데는 달리 설명할 도리(道理)가 없습니다. 선정(Samadhi)을 말하자면, 보통 팔선정(八禪定)에 멸진정(滅盡定)을 추가해 구선정(九禪定)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석가모니도 깨달음과 연관해서는 색계(色界) 사선정(四禪定)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초기(初期)에..
‘나’라는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아기는 이기적(利己的)으로 된다고 합니다. 利己心는 어두움을 불러옵니다.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언어(言語)가 만드는 것이므로, 말을 쉬면 생각도 잦아듭니다. “태초에 말씀(Word)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하느님이니라 (요한복음 1:1)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끝에 깨닫는다(言下大悟)는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잘 듣고 행간(行間)에 숨겨진 것을 찾아냅니다. 정말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학식과 이론)를 내려놓고 스승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야 합니다. 혼자 오래만 앉아 있다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주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언어로 전달됩니다. 오죽하면 말을..
선도(仙道)에 대해 華道(세계선도연맹 네이버 카페)에 적힌 글을 읽다 보면, 깨달음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오히려 선도의 주제인 불로장생이나 소주천(小周天)보다도 더 자주 소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선도와 연관된 도서들을 읽다 보면, 깨달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단전(丹田)과 소주천(小周天), 태식(胎息)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선도는 이(理)보다는 너무 기(氣)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도 하는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인가? 간단히 말해, 선도의 깨달음은 당연사이기 때문이다. 선도의 공법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의수단전(意守丹田), 즉 뜻으로 단전을 지키는 것이라 하겠다. 의수단전을 인도식 표현으로 하면 복합 사마타(Samatha)라고 하겠다. 그 이유는 의수단전에 심..
세상엔 수많은 신앙인이 있고, 극소수의 수행자가 있다. 신앙(信仰)은 "믿어 우러르는 것(worship)"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는 따로 수행(修行)이 필요하지 않다. 신앙인은 신앙의 대상에 전적으로 귀의(歸依)했으므로 그의 가르침이라면 무엇이든 믿어야 하고, 무엇이든 그 대상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돈을 내라 하면 내야하고, 심지어 살인을 명령해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보상으로 천국이 보장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의 대상이 직접 험한 일을 시키는 법은 없다. 항상 인간 대리자에 의해 지시된다. 그런 점이 수행과는 아주 다르다. 수행자는 교파(敎派)에 소속되기 어렵다. 더러 소속되는 경우가 있어도 곧 이단(異端) 대접을 받게 되는데, 이치(理致)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의문을 품기 때문이..
예수를 비롯하여 성인(聖人)들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믿느냐?"며 늘 그들의 믿음을 확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자유를 얻은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들의 믿음을 요구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자비심입니다. 그에겐 타인의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그를 믿든 믿지 않든,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이 믿는다고 그가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믿음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들에겐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외 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치를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해가 늦는 아이에게 나는 "외워라. 그렇게라도 해야 낙제는 면할 거야. 혹시 10등 안에 들지도 모르지."라고 말..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어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할 곳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행복해야 합니다. 오늘 행복하지 못하면 영영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후일을 기약하지 마십시오. 그날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오늘 공부하십시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오늘뿐입니다.
죽으면 에너지가 흩어지고 맙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만 남길 뿐입니다. 죽은 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죽어 없으니 이해 못 하는 내 머리가 문제라며 끙끙대겠지요. 죽은 스승은 에너지를 가져올 수도, 심어줄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스승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 이야기는 허공에 메아리쳐봐야 거기서 거기입니다. 살아있는 스승이라야 만져볼 수도, 따져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밝음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구해야지요. 떠난 사람, 죽은 스승에 대한 미련은 인제 그만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5년 전, 무당산 용문파 장문인 호광발(胡光發) 선생을 초청하여 韓中氣功大會(장소: 롯데호텔 그랜드볼룸)를 개최했을 때의 일이다. 서울 지하철을 타보고 싶다 하여 함께 2호선을 타러 가던 중, 객차 앞에 선 胡 선생이 갑자기 양손으로 이상한 동작을 연출하여 무슨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짓자 그의 대답은 氣로 방어막을 설치하는 중이라 했다. 혹시 몰라서 전염병 예방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웃고 말았는데 코로나가 돌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는 일이다. 선도(仙道)를 어느 정도 닦고 나면 수련을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온몸을 싸고도는 느낌을 받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에너지를 실감하게 된다. 최근에 와서 외출하기 전, 소주천(小周天)을 통해 방어막을 만드는 나를 보면서 그때의 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