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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싯다르타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가르쳤다고 합니다만, 저는 의식(意識)의 초점(焦點)이 잡히면 상락아정(常樂我淨: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樂), 대아(大我)·진아(眞我)의 경지로서 집착을 떠나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아(我),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정(淨))을 느끼고, 점점 현실 생활에서도 그것을 실감(實感)합니다. 그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리되면 과거엔 이해(理解)가 되지 않았던 성현(聖賢)들의 말씀이 저절로 풀리고, 그 합리성(合理性)을 실감합니다. 그것은 의식의 초점을 잡는 노하우(knowhow)의 첫 체험을 한 날 저에게 각인(刻印)된 듯싶습니다. 가끔 일상생활 속에서 무상(無常)과 고(苦)가 미미(微微)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저절로..

"무심(無心)에서도 氣가 돌아가나요? 우리가 가만있어도 혈액 순환이 되듯이 가만있어도 氣 역시 도는 것은 아닌가요?"라는 질문(질문자의 직업은 기관사입니다)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이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무심(無心)에서도 기(氣)는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간과(看過)하신 것이 있습니다. 氣가 잘 흐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때에 한해서만 氣는 원활(圓滑)하게 흐릅니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 어느 한 곳에 흐름 장애가 발생하면 처음엔 불쾌감(통증 마비)이 생기게 되고, 방치하면 기능저조가 일어나고, 나아가 그것이 병(病)의 원인이 되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사망(死亡)하게 됩니다. 흐름 장애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그 원인을 내인(內因)과 외인(外因)으로 나누..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수행자에게 있어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힌두(Hinduism)이든, 불교(佛敎)이든, 선도(仙道)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약간의 기법(技法)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힌두들의 깨닫는 법은 보통 만트라(Mantra 또는 진언[眞言: 참된 말, 진실한 말, 진리의 말] 혹은 밀주(密呪) 또는 다라니(陀羅尼)라고도 하며 "영적 또는 물리적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발음, 음절, 낱말 또는 구절)를 통해 사마디(Samadhi, 禪定, 三昧)를 체험함으로 신(神) 혹은 진리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힌두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방법론에 있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합니다. 힌두처럼 만트라(呪力)를 사용하기도 하고 관법(觀..

불쾌한 일이 있을 때, 그 감정(感情)을 붙잡아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체험도 감정도 그것이 나는 아니다. 깨달음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고도 우울한 사람이 있다. 십중팔구는 본인의 체험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얻은 것은 사라진다. 누구라도 깨달았다고 하면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준다. 헌데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들이 자기의 깨달음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감정과 자기를 하나로 만들고 그 감정을 자기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 영화에 평을 읽고 극장 앞만 서성인다고 그 영화를 보지는 못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

도로는 그 나라 부(富)의 상징이다. 도로 정비가 얼마나 잘 되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국력(國力)이 평가된다.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도로(道路)이다. 이 고속도로가 생기게 된 이유는 자본과 인구가 몰린 수도권과 국제무역의 요충지 부산을 하루 생활권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治績) 중 제일은 당연히 경부고속도로이다. 그는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찰 후 우리나라에도 고속도로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남북 국토를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는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재가 희석되고 있으며, 일부로부터는 신(神)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의 기획 초기에는..

불교 경전 금강경을 보면, 귀찮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 말이 '아상(我相)'이며, 허망(虛妄)한 것이므로 제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역설한다. 그 영향인지 그 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하루 빨리 버려야 할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한편으로는 그것을 마치 보물처럼 가슴에 지니고 산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상(我相)이란, 단지 ‘나라고 하는 생각’이며, 나의 소유물일 뿐이다. 그것은 애지중지할 것도 못 되고, 내다 버릴 정도로 악취나는 것도 아니다. 아상(我相)은 그저 나하고 함께 사는 오랜 친구이며, 가족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나타났으며, 죽일 수도, 갖다 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다. 아상(我相)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아난다(Ananda)는 석가(釋迦)의 사촌 동생으로 그의 시자(侍者)로 일하며 가장 많은 설법을 들어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했답니다. 대부분의 초기 경전이 그의 기억력에 힘입어 결집(結集)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석가의 말을 모두 외울 정도로 영특하였으나, 실제로는 깨닫지 못해서 붓다 입멸(入滅) 후 상당 기간 소위 '아라한'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심심치 않게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는 자는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우리처럼 고통받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어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한 듯도 보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뻔히 아픈 것을 두고 '안 아프다'를 외운다고 하여 ..

몸과 마음은 연기(緣起)한다. 몸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므로 몸이 있다. 당연히 몸과 마음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로 알고 산다. 그러므로 깨닫기 위해선 五蘊을 비추어 보면(照見) 된다. 마음을 알기 위해선 우선 몸을 주재로 공부하는 것이 유리하다. 몸(色)이 없다면, 느낌(受)도, 생각(想)도, 의지(行)도, 알음알이(識)도 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몸을 중심 삼아 공부할 때, 거기서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알음알이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그것을 알아채는 변치 않는 놈이 드러난다. 경계(境界)를 따라가지 말고, 그것(自性)에 자리 잡으면 그대로 깨달음이다. 그다음은 몸과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알음알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여여(如如)하게 사는 것..

"불교와 힌두교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힌두교와 불교는 인도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다. 힌두교는 불교가 쓸고 간 자리에 먼저 있던 브라만교의 후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초장(初場)부터 브라만교의 움직일 수 없는 '아트만(Atman)'설을 반박하는 무아(無我)설을 내놓으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힌두교와 불교는 거의 비슷하다. 나머지는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윤회(輪迴)에 대해서 우선 다루어보기로 하자. 석가모니의 주장처럼,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윤회(輪迴)하는가?"라는 질문에 오늘날 불교학자들은 무아론(無我論)적 윤회(輪迴)란 아리송하고 어려운 주장을 한다. 무아(無我)는 맞지만, 윤회(輪回)도 한다는 것인데..

힌두교와 불교(佛敎)는 '나'라고 하는 영구적 실체(實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가능하다. 깨우침을 얻은 싯다르타는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無常)"에 이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無我)"를 설했으며, 그것은 브라만교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아트만(Atman) 영구불변설(說)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설(輪迴說)은 단지 설(說)로만 끝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입멸(入滅)한 후, 인도의 거의 모든 불교신자는 다시 브라만교에서 개명(改名)을 한 힌두교로 개종(改宗)하였으며, 불교는 인도 밖으로 옮겨갔다. 성경(the Holy Bible), 특히 구약(舊約)을 보면, "영혼은 죽으며(에스켈 18:4)", "온유한 의인들은 천당이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