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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사람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해도 그것이 그 사람의 가치 기준이며, 존재의 표현이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라고 형편을 탓할지 몰라도, 누구나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運命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선택에 의해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선택에 대해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혹 된다고 할지라도 민폐를 끼친 것이 아닐까? 각자 자기 처지에서 선택한 가장 좋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는 각각 자신의 가치 기준이 있으며, 무슨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선택을 주도한다. "평안감사도 나 싫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벌써 2018 달력이 한 장만 남았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간다. 그러나...모든 것이 지나가도 마치 CCTV 렌즈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만은 如如하다. 그것을 사람들은 "覺" 혹은 "眞我"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것도 에너지가 다하면 작용이 중지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오직 에너지(氣)만이 에너지를 작용시킨다. "나는 누구인가?"를 이렇게 바꿔 말하면 어떨까? 《에너지(氣)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모든 것은 지나가도 氣는 영원하다. 그것은 모든 것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남인도 바라문가에 한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는 釋迦에 귀의하였는데, 당시 인도의 신앙 형태가 붓다 가르침의 본질에서 왜곡되어 가는 것을 한탄했답니다. 사람들에게 正法(?)을 설하였으나 먹혀들지 않자, 他國에 전하기로 결심하고 중국에 왔답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불교 역시 깨달음보다는 祈福信仰이 만연했답니다. 王(梁武帝)을 만나 설득하는 것이 좋을듯하여 그를 만났으나, 그 역시 자기 업적 자랑하기에 바빴답니다. 식상하여 "너는 누구인가?"라는 그의 진지한 물음에도 "모른다"라고 답해준 채, 小林寺에 들어가 面壁으로 9년을 지냈습니다. 말년에 간신히 혜가(慧可)라는 제자 하나를 얻어 당시로선 획기적인 선종(禪宗)을 열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이름은 달마(Bodhi Dharma)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詩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결말을 보려면 그 시작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는 가을부터 내년 농사를 생각하고,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가는 기초공사부터 든든히 합니다. 수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八正道의 첫 번째는 '正見'입니다. 하지만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초발심자에게서 바른 견해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견해는 아직 俗世의 시각(視覺)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식(正式)으로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최소한 1년 정도 行者로서 힘들게 나무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동안 선배들 밑에서 과거의 가치관들을 정리하고, 수행에 입각한..
선생은 많은 것(知識)을 주지만, 스승은 제자가 얻어 지닌 것들을 모두 뺏는다. 그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단지 마음속 거품을 걷어내어 本性品 자리를 드러나게 해준다. 그러므로, 스승을 만날 땐 자기를 맡겨야 한다. 무언가를 얻으려 해선 안 된다. 오히려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얻어온 잡동사니들이 모두 무산되었을 때, 비로소 實在가 출현한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ready-made, 먹고 입고 쓰는 것을 구하려면 선생으로 족하다. 스승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생기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에너지)을 준다. 스승은 에너지 자체이다. 그가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버지는 나를 낳았지만, 스승은 나를 復活시킨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모두 적용된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개인 소득 중심경제냐 전체 소득 중심경제냐, 수구(守舊)냐 개방(開放)이냐 등 말이다. 그것은 신앙(信仰)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基督)을 말하자면 구교(舊敎)/신교(新敎), 불도(佛道)라면 상좌부(上座部), 대승(大乘), 아니면 선불교(禪佛敎), 이슬람이라면 시아파/수니파로 나누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람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안(事案)은 전에도 다룬 적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두 단어의 의미를 두루뭉..
이루어도 이루어도, 가져도 또 가져도 늘 허전함이 남는 사람, 늘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사람, 노령(老齡)이나 지병(持病)으로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자각(自覺)이 진정으로 절실한 사람... 그런 사람이 道에 입문하면 어렵지 않게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깨우치는 공부를 우선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더 얻을 것이 있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 배운 것이 많아 말과 글에 의미를 두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는 사람, 지금 이렇게 사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있나? 하는 사람에겐 見性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깨달음이란 일 없는 사람들의 놀이처럼 보일 겁니다. 마치 구름 잡는 일처럼, 실익(實益)이 없다고..
하늘이나 땅이나 氣(에너지)로 가득합니다. 내 몸과 밖 모두는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보통 공적(空寂)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氣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알아챔이 견성은 아니며, 論理의 깨우침도 견성은 아닙니다. 五感을 떠난 실감(實感)이 活潑潑 살아 있어야 제대로 된 見性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야 실생활로 연결되니 말입니다. 그럴 땐 필히 氣(에너지)가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存在는 에너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는 생각의 간극, 마치 휴식 시간 중의 텅 빈 스크린처럼 고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우리의 본마음이며, 그 자리의 作用에 의해 세상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숨겨지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자리 없이 우리는 生存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에너지의 원천자리이며, 우리는 그 자리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삽니다. 에너지 없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見聞覺知 마디마디마다 소리소문없이 나타나, 있는 듯 없는 듯, 에너지 충전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造化입니다. 하지만 無知의 소치로 우리는 그 소중한 자리의 가치를 망각하고 그 귀하디귀한 에너지의 기회들을 낭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번뇌 망상으로 인한 에너지 고갈로 대부분의..
잠을 자는 이유는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단 몇 분 깜박 잠을 잔 것 같은데 온 몸의 피로가 풀리고 정신이 맑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너지 충전의 효율화 때문입니다. 아무리 잠을 많이 잤어도 잠자는 내내 이것저것 별 소용이 없는 잡생각들이 끊기지 않았다면 에너지를 낭비했을 뿐 잠을 자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땐 잠에 집착 말고 긴단한 外丹功과 丹田 주시를 배워 보세요. 잠보다 더 깊은 에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땐 만사를 제치고 에너지 보충을 해 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에너지 덩어리이며, 존재 역시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잘 통하면 건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