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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무엇이 보였는지,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기도 명상으로 오랜 기간을 몸 바쳐 수련해도 깨달음의 길이 멀어지는 이유는, 진실을 따르지 않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보고, 누가 듣느냐이다. 보이고 들릴 때, 즉시 보고 듣는 당체(當體)로 시선(視線)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回光反照). 그 자리에 이르면 시공(時空)이 끊어진다. 그것이 바로 깨닫는 비결, 일승법(一乘法)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는 훈련이 거의 되어있지 않다. 몇십년을 닦아도 도달치 못하는 이유는 습관대로 "그것"을 외부(外部)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이다.
끝까지 "나"는 있습니다. 나(ego)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아는 나마저 없다면, 없어졌다는 것은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이 몸과 마음이 나인 줄 알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나의 소유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나는 사라지고 없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무아(無我)란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었던 '나'라는 것"이 "내가 아니란 것(五蘊皆空)"을 깨우친 것입니다. 자아(ego)는 사라지지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이 몸과, 이 마음과, 함께 죽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그대로입니다. 깨달음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의 휘하에 들어오도..
믿음은 편안한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간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구걸하듯 매달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조바심내지 않습니다. 소리 지르며 울부짖지 않습니다. 투쟁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정해진 시간(定時)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굳이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理(性)의 자리(本性)는 텅 비어 있고, 고요하다고 표현되고 있으나(空寂靈知), 사실은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으며, 소리란 소리는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의 작용은 한이 없습니다. 그것에 氣가 작용을 시작하면, 알아채는 기능에 더해 전지(全知)뿐 아니라 전능(全能)해집니다. 그것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조건만 충족되면 만물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모든 권능이 그의 손에 있습니다. 理와 氣의 이치를 깨우치고, 그 작용의 메커니즘(mechanism)이 파악되는 순간, 세상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人間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대체로 삶을 긍정적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해주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대단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까지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에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神), 도(道), 자연(自然) 등의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
밝아진(見性) 사람은 생각 없이 사나요? 아닙니다. 그는 생각의 주인입니다. 생각이 필요할 때는 생각을 불러내고, 필요 없을 때는 "쉬어라" 하고 지시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의 바탕 자리(本來面目)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이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일토록 그의 친구는 에너지(氣)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의식(意識)과 에너지(氣)의 계합(契合)이며, 仙道 용어로는 태식(胎息)이라 하는 재밌는 놀이입니다.
나그네는 주막에 도착해 자기 허기(虛飢)만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말에게도 넉넉히 먹이를 줍니다. 자기만 밥을 먹고 말을 굶기면, 말이 움직이지 못해 부득이 여정(旅程)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이(理)이며, 말은 기(氣)입니다. 소식(消息)을 들었던 수행자들의 대부분이 낙오(落伍)하고 마는 것은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서입니다. 여행길에 말을 버리고 갈 수 없듯, 理氣는 一元입니다(氣發理乘). 한 소식을 했으면 그다음부터는 필히 氣 공부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무난히 공부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공부자는 丹田을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소주천(小周天)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깨우침은 너무 쉽지만, 그것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에너지(氣)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小周天을 완성하려면 全身의 기맥(氣脈)이 모두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적인 운기(運氣)가 이루어집니다. 小周天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태식(胎息)으로 연결되어 도태(道胎)를 이룹니다. 그때부터 에너지체(陽神)가 자리를 잡습니다. 小周天과 양신(陽神)은 仙道수련의 핵심입니다. 小周天에서 에너지체(陽神)로 이어지는 과정에 외단공(外丹功)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장호흡(長呼吸)만으로는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추천할만한 外丹功으로는 태극권이 으뜸입니다. 무리가 없는 호흡으로 안정적인 축기(蓄氣)를 돕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수행의 결과물이 아니다. 먼저 깨닫고(頓悟), 그 후에 수행을 진행(漸修)하는 것이 맞다. 깨달음이 없는 수행은 헤매기만 할 뿐 결국은 허탈만을 남긴다. 그것은 마치 종착역이 없는 서울의 지하철 2호선과 같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나를 떠난 적이 없다. 그것은 마치 책상 서랍을 열기만 하면 보이는 예금 통장과 같다. 그저 서랍을 열기만 하면 된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서 해야 하는 공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을 숨 쉬게 만드는 수련, 깨달음을 활성화하는 수련이다. 전철에서 내려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수련이다. 책상 속 통장을 꺼내 현금화하는 수련이다. 평생 허깨비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알고 가..
그 자리를 깨우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지 않습니다. 빈틈이 없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그 자리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 자리는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닫혀 있어서는 답답한 것은 나입니다. 문을 열면 나도 세상도 밝아집니다. 우주가 모두 네 암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벽(開闢)이 일어나야 합니다. 활짝 열릴 때, 어리석음은 녹아버리고 밝음이 온 세상을 비추게 됩니다. 온 세상은 나와 우주가 함께 춤추는 그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