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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엽전이 뭘 할 수 있어?" 불과 몇십년 전,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卑下)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스승님의 "곧 한국이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가 될 거야"라는 말씀은 쉬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조선은 이미 상등국(上等國)이 된 듯싶습니다. 첫 번째로 느낀 것은 타국의 공항에 내렸을 때였습니다. 한국의 공산품, 자동차, 선박, 전자 제품, 반도체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제의 최고상을 받고, 한국 가수들이 세계 위에 우뚝 섰습니다. 오늘은 우리 축구가 세계 대회를 제패할 뻔했습니다. 그것으로 상등국이 된 것일까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세계를 움직여야 할까요? 한국의 정신, 한국의 사상, 한국의 깨우침, 한국만의 신선사상(神仙思想)으로 세계..
삶의 고뇌(苦惱)가 닥쳤을 때, 그것에 쓸려 흘러가지 않고 그것 속에서 무상(無常)을 보고, 그것이 견처(見處)가 된다면 번뇌(煩惱)는 즉 보리(菩提)로 변하는 겁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공부 생각은 나지 않고 더 맛난 것 없을까만 찾는 법입니다. 막다른 길이 다다른 것을 행운(幸運)으로 아십시오. 싯다르타처럼 조작하지 않고도 저절로 감당키 어려운 위기가 닥쳐왔으니 말입니다. '정말 이런 대접을 받고도 사는 게 맞아?'라는 큰 배신감 앞에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안 태어났다 치고 나를 한번 던져봐?"라는 각오가 힘을 얻을 때, 비로소 언제 숨었냐는 듯 밝게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좋은 사주(四柱)를 타고나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착한 자녀 속에서 무난하게 삶을 마치는 것은 불행..
작용(作用)은 에너지(氣)의 발현(發現)입니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부조(不調)를 이루고 있으면 원만한 作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깨달음(見處)을 얻었으면 작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作用은 에너지에 힘입어 일어납니다. 깨달음이 있어도 作用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지요. 깨달음 후에는 필히 에너지 공부를 추천합니다. 기철학(氣哲學) 등등.. 말로만 하는 에너지 공부는 소용이 없습니다. 몸을 알고, 숨을 알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통기(通氣)와 축기(蓄氣), 운기(運氣)를 힘써 행(行)해야 합니다. 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했습니다. 上士聞道勤而行之 (지혜로운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한다)
요즘 지옥이란 말을 여기저기서 자주 듣습니다. 가보지 않아서 그 사람들이 무엇을 지옥이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 같습니다. 이 밥에, 고깃국을 넘어, 왕들이 먹던 음식을 먹고 살며, 황제가 입던 옷을 입고, 여름에도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집에 살고 있고, 말이 끌지 않는 마차를 타고 다니며, 지구 반대편 일을 눈으로 확인하고, 물길, 하늘길을 맘대로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을 지옥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이니 말입니다.
처음엔 사사건건(事事件件) 의식하며 살려고(깨어있으려) 애썼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견처(見處)를 확인하고 나서도 일어나는 경계(境界)에 더러는 깜박 속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습니다. 한참을 흐르고 나니 보이고 들리는 것 하나하나가 見處 아닌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가 무르익었나 봅니다. 바람 불어도 좋고, 비가 와도 좋았습니다. 맑게 갠 날은 그런 날대로 좋습니다. 그야말로 일없는 사람(無事人)으로 소풍 같은(逍遙遊)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을 모두 얻었어도, 내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남겨진 그 이름이 죽은 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죽은 정승보다 산 개가 낫다 하지 않던가요? 억만금과 명예를 두고 죽든,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을 지니고 죽든, 죽음은 매일반 아닐까요? 명성(名聲)도 지나가고, 깨달음도 지나갑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 간에, 세상에 목숨보다 귀(貴)한 것은 없습니다.
이 몸과 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이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놈이 바로 "나"입니다. 보고 있는 자, 듣고 있는 자, 느끼고 있는 자를 보려 하거나, 들으려 하거나, 느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에 "나는 없다(無我)"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있어 너도 있고, 세상도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하늘도, 땅도, 하느님도, 부처도 없습니다. 인생이 한바탕 꿈과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나시나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꿈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꿈을 만드는 그놈은 누구일까요?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그것을 사용하여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지녔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가진 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자기 정체성에는 관심조차 없이 산다면... 사람이라 하기가 좀 곤란하지 않을까? 불쾌할지는 몰라도 더 나은 것을 찾아 선택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닌 神性에도 관심조차 없이 산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짐승도 먹고, 자고, 집 짓고, 먹을 것 모으고, 잘난척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氣는 몸과 마음의 상위(上位)이다. 氣가 어떤 상태이냐, 즉 기분(氣分)의 상태에 따라 우리의 건강 상태는 좌우된다. 氣가 막히거나 부족하면 몸은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지며, 우리의 마음 역시 氣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氣를 알고 운영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어려움(苦)에서 벗어나고, 氣에 대한 파악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에 이른다. 氣는 道와 하나다. 氣를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이며, 氣는 우리를 神性에 이르게 하는 통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