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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모두가 밥을 먹었어도, 내가 안 먹었으면 허기가 질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밝아졌어도, 내 눈이 감겨 있으면 어두울 것입니다. 聖人이 무더기로 나더라도, 내 눈 귀 막혀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 눈이 밝아지면 세상의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닙니다. 우선 나부터 깨우치고 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우선 에너지(氣)부터 연결하세요. 에너지가 약하면 불빛이 흐려집니다. 밝음은 에너지로부터 옵니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갈등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교차점검(cross check)입니다. 이치(理)와 현상(事)은 둘이 아닙니다만,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수용해야 할 때도 있고, 더러는 거부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선택할 때, 순수의식(純粹意識)이 기초가 된다면 쉽게 해결됩니다. 현상 세계와 어울려 cross checking을 하세요.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보류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자주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의식에 머문다는 것은 최고의 선택을 위해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체(體)와 용(用)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체가 없는 용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용이 없는 체는 체라고 할 수도 없다. 이(理)와 氣도 마찬가지다. 이(性)가 없이 氣는 작용할 수 없으며, 氣의 작용이 없는 성품(性品)은 무용지물이다. 깨우침이 없이 氣만 닦는다고 안정이 올 수 없으며, 아무리 큰 깨우침이 있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해 줄 에너지가 없다면 허망함만 남을 것이다. 견성(見性)을 이루었다면 氣 공부에 힘써야 하고, 氣를 알았다면 그것이 밝음(깨달음)으로 이어지도록 생각들을 정리하여야 한다. 새가 한 날개로만은 날 수가 없듯이, 理와 氣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의 큰 잘못은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 대문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집 안에 있는 주인에게 용건이 있다면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야 합니다. 대문 안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린들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이 열렸다고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몇천 리를 찾아 헤맨다 해도 거기선 주인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만난다 해도 결코 주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 제자 귀를 잡아당기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었던 이유를 이제는 좀 알겠습니까?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알면 즉각 허깨비 놀음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 놀음에서 벗어남이 곧 깨달음이다. (知幻卽離 離幻卽覺)"라 하였습니다.
氣는 감각할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것이 定說이었지만, 이제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곧 의지만 있으면 뇌파(腦波)를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이 됩니다. 뇌파는 의식적으로는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머릿속 생각만 정리하면 뇌파는 낮아져 마치 잠잘 때의 뇌파(알파파)가 형성됩니다. 거기서 한 단계만 더 내려가면 깨달음과 만나는 腦波帶(세타파)가 있습니다. 알파, 세타 뇌파대 만들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몸에 힘을 빼고 생각만 정리하면(無念無想) 저절로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언제든 확인이 가능한 일입니다.
利己的인 사람이 되십시오. 깨달음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처자식 버리고 혼자 山으로 가겠습니까? 깨달음은 자기 문제의 해결책일 뿐, 타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입니다. 이타행(利他行)이 그럴듯해 보여도, 알고 보면 利己心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위선(僞善)을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말과 행동이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이웃 사랑 그런 것들은 제자리에 그대로 두십시오.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聖靈)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일단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마중물이란 펌프질을 할 때 위에서 붓는 물을 말한다. 아이 적에는 마중물이 물을 만들어낸다고 믿지만, 어른이 되면 진실을 알게 된다. 물은 땅속에 무한히 있다. 사용하는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퍼내면 다시 고이기 때문이다. 마중물을 식(識)이라 하고, 밑물을 氣라고 비유할 때, 識은 처음 氣를 알아챌 때만 필요하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 氣(에너지)이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氣를 무시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 識이 주(主)이고, 氣는 객(客)이라는 것이다. 무식해도 너무 무식한 이야기다. 세상에 識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皆是虛妄). 識이란 바람같이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識이 主이고 氣는 客이다'는 말은 마치 파도가 치는 것을 보면서 바람..
깨달음이란 꿈을 깨고 나니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이 헛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살아보니 70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꿈속처럼 도무지 가늠이 안 됩니다. 놓치고 싶지 않아도 우리의 알음알이나 소유물들은 오래지 않아 나를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오지도 가지도 않는 自明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친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2019년은 한국에 특별한 해이다. 남북 해빙 이야기보다는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기는 해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그것은 정신개벽(精神開闢)의 시금석(試金石)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물질보다 마음이,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하지만 內心은 다르다. 그들의 마음속엔 무엇보다 돈이 최상위에 자리하고 있다.생활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3만 불의 시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소한 먹고 입는 문제로부터는 벗어난 삶이 된다는 뜻이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도 피할 수는 없다. 3만 불은 그동안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만을 위해 달려왔던 사람에게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태함도 나타날 것이고,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률도 늘어날 ..
'그 자리'를 깨우쳤다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니 오직 그것뿐, 세상사 모두가 그 자리로 수렴되고, 모든 作用이 그 자리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가리켜 깨달음, 見性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자리는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원래부터 그 자리요, 손대지 않아도 그 자리다. 그 자리는 언제나 如如하게 지금 여기에도 있다. 그 자리는 값으론 환산할 수 없는 너무 가치 있는 자리다. 하지만 그 자리를 팔아서는 라면 한 개도 사지 못한다. 그 자리(無爲自然)를 값지게 지켜주는 것이 있다. 그 자리를 빛나게 해주는 것(作用)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자리는 有名無實하다. 그것을 모르면 그 자리는 無用之物이 된다. 그 자리를 알았다면 늘 함께하는 나머지 하나도 알아야 정상이다.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