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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과학(科學)이라 한다. 고로 보편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것, 체계적이지 않은 것에 과학이란 이름을 끌어 써서는 안 된다. 특히 신앙이란 전적으로 주관적이므로 그것에 과학을 대입한다는 것은 사려 깊지 않은 태도이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이 자신의 信仰에 과학의 옷을 입히려는 태도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사기성이다. 신앙은 신앙대로 가치가 있다. 과학에 의존치 말고 그들대로의 길을 가야 한다. 과학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태도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인(自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혜에 기초하여 과학은 과학대로의 길을, 신앙은 신앙대로의 길을 가면 된다. 그리하노라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문: 사람의 근본은 선(善)합니까? 악(惡)합니까? 답: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일입니다. 한번 그리해 보십시오. 당신의 본래 자리는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마음은 하나입니다. 거기에서 탐진치(貪嗔痴)도 일어나고, 깨달음도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것들에 연연치 말고, 일어나는 바탕 자리에 관심을 고정해 보세요. 마음을 조복(調伏)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은 구조적으로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휘둘리지 말고 마음이 일어나는 바탕 자리에 관심을 고정해 보세요.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크고 밝으며, 모든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는 ..
에고는 생각과 분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만듭니다. 생각이 없이는 에고가 작용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自性은 공적(空寂)한 판(Screen)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자리는 생각의 놀이터가 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나뉘며, 그 위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일어납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는 그 자리에 공존하며, 여기와 거기도 사실상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판(板) 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켜보는 신비한 것(cognition)이 바로 당신 자신이며, 그것이 곧 영지(靈知)라고 불리는 자성(自性)입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神에게 숭배(崇拜)를 바칩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神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을 神인들 달가워하실까요? 자기를 아는 사람은 神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서 늘 神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神에게 즐거움과 감사함을 전하며 삽니다. 그런 사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호흡을 통하여 자연 에너지를, 그리고 식물(食物)을 통하여 물질 에너지를 거두어들여 살아갑니다. 하지만 물질 에너지는 가급적 적게 사용할수록 좋습니다. 과다한 소비는 그 과정에서 불순물 생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연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의 적절한 balance(調和)가 필요합니다. 불순물을 정화시켜 우리를 청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단전(丹田)이 맡아하며 순수한 에너지일수록 자연(神)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仙道에서 단전호흡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러한 원리에 근거합니다.
소주천(小周天)은 우리 몸에 흐르는 두 개의 기맥(氣脈)을 통하게 하는 仙道의 행법(行法)입니다. 그것을 "仙道의 꽃"이라 부르는 이유는 소주천을 기점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맥(脈)은 배부정중선(背部正中線)을 따라 흐르는 독맥(督脈)과 복부정중선(腹部正中線)을 흐르는 임맥(任脈)입니다. 그것이 그리 특별한 이유는 두 맥이 양맥(陽脈)과 음맥(陰脈) 20 脈을 총괄하고 있어서 두 脈만 통관(通關)을 이루면 나머지 모든 脈이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주천은 만병(萬病)을 다스립니다. 病이란 氣가 막혀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주천은 어렵지 않습니다. 독맥과 임맥은 누구나 이미 통하고 있습니다. 두 맥을 연결하기만 하면 바로 소주천입니다..
"흙 바른 벽도 氣가 떠나면 무너지느니라." 甑山선생의 말씀입니다. 저절로 되는 듯싶어도 세상은 에너지가 받쳐줘야 움직입니다. 눈만 뜨면 "깨달음"을 외치던 道人(?)도 기운이 진(盡)해지니 헛소리하고 바지에 오줌 지립디다. 몇억 한다는 고급 승용차도 배터리 방전되면 꼼짝도 못 합니다. 氣가 없는 理는 "理"가 아니듯, 氣가 빠진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떠들어대도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진다고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분별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조차 없습니다. 덕장(德將)은 싸우지 않고 이깁니다. 살생을 피하고 항복 받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습니다. 에고는 죽일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에고로부터 주권(主權)을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 몸과 이 마음이 살아있는 한 에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우르면서 자기 일을 하게 하면 됩니다. 주도권(主導權)만 되찾아 오면 만사는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믿음처럼 고귀한 것도 없지만, 믿음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믿음처럼 훈훈한 것도 없지만, 믿음처럼 당혹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알고 있을 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자기에서 그쳐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남들도 모두 믿게 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하면 믿음이 폭력으로 변하고, 결국은 살상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고귀한 믿음이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