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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일본을 이야기하자면 무사도(武士道)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엔 무사도가 거의 퇴색되어 버렸다고 많은 이가 슬퍼합니다. 그것이 일본 정치계가 당면한 자학적 태도의 원인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세계의 흐름에 역행(逆行)하는 근시안적인 정치형태 말입니다. 무사도는 불교와 도가(道家) 그리고 공맹(孔孟)을 기초로 한, 의(義), 용(勇), 인(仁), 예(禮), 성(誠), 명예(名譽), 충의(忠義)라는 7가지 덕목을 숭상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저변에는 깨달음에 대한 비장함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무라이 정신, "나는 다다미 위에서 죽지 않겠다. 나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 나보다 한 수 높은 사람의 칼에 맞아 죽겠다"라는 태도.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 첫째, 현재에 안주하지 않겠다 - 둘..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는 것(見聞覺知)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단, 볼 때는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느낄 때는 느끼기만 하고, 알 때는 단지 '그러하구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석 없이 단지 '그러하구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존의 정보를 끌어내 그것에 덧입혀 사용하며, 그 순간 그것은 본질에서 어긋나 버립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고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깨달음은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하느님은 공평치 못한 존재이며, 인류의 조상을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말도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를 믿든, 부처에게 절을 하든, 누구에게나 생명(마음)이 있습니다. 깨달음과 구원 이전에 존재의 중심자리가 무엇인지부터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마음(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든, 구원을 받든, 그 생명 자리를 모른다면, 구원이든 깨달음이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우리가 오랜 세월 번뇌와 망상(妄想) 속에서 살아 온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깨달음의 가치가 너무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깨닫고 나면 몸(깨달음은 건강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람도 많다)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바로 완성형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더 높고 깊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공부의 끝이라면, 왜 석가는 깨달음의 최고 단계(아라한)에 올랐다는 제자에게 숲속에 평생 머물며 자기를 닦는 일로 소일하라 하였으며, 선불교(禪佛敎)의 제자들은 왜 깨달음을 얻고도 몇십 년간을 움직이지 않고 스승 밑에 머물렀던가? 성인(聖人)이라는 사람들은 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위해 하는 짓이고(가족을 위해 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 권세(權勢)를 얻으려 애쓰는 것도 자신을 위한 일이며(共益을 위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명예를 얻거나, 자기 씨를 퍼트리려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라지거나 자기가 누군지 모르면 그딴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으며, 돈, 권력, 명예,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에너지(氣)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그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돈, 권력, 명예를 내 것으로 누리고 살 텐데 말이다. '개벽(開闢)'이란 다른 게 아니라 훤하게 열린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관심이 엉뚱한 곳을 향하고만 있으니, 부득이 자연의 섭리는 개벽이란 것을 이용하여 인간들을 눈뜨..
그는 "바로 이겁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누구인가? 깨달음이 무엇인가? 부처가 온 까닭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 가장 마땅한 대답이 "이겁니다"라고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겁니다" 할 때, 거기서 생각은 끊어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에너지, 즉 氣뿐이다. 고함을 치거나, 몽둥이찜질, 그리고 "無" 字나 "須彌山", "뜰 앞에 잣나무", "똥 막대기", "삼서근", "東山水上行"을 부를 때처럼 말이다. 성리학(性理學)은 "이(理)가 일어나면 기(氣)는 그 뒤를 따른다(理發氣隨). 그리고 氣가 일어나면 理는 그 위에 올라탄다(氣發理乘)"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이기일원(理氣一元,) 즉 '理와 氣의 양자(兩者)가 같다(同)'는 말로 끝맺는다. 방하..
뚜렷한 목적이나 목적지가 없이 기차를 타는 사람이 많아졌다. 기차를 타기만 했다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이 목적지를 지나쳐 버리기에 십상이다 많은 선지자(先知者)가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음에 대한 관심이 커져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세계적으로 명상(冥想)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부분이 마음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명상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실제 미국에서는 정신과에서 명상을 추천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명상이 무엇인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설명하는 선생은 거의 없다. 또한 명상의 목적에 대한 설명도 뚜렷하지 않다. 그런 스승 밑에서 명상한답시고 다리 꼬고 앉아 저린 걸 참는다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싯다르타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줄 때 ..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라 하면,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 즉 의문스러웠던 것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의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선 생각과 궁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주체(主體)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생각의 주체(自我)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물리의 법칙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부터 비롯되는 관계의 문제나 그 어려움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수행자의 주제(主題)는 오직 "나"라는 존재,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한 것 뿐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만이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습니다(不昧因果).그러므로 어찌하면 건강해지는지 알며, 어찌하면 병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집니다. 운동은 어떻게 해야 하며, 무슨 음식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또 마음을 어떻게 조절해야 건강한지에 대해서도 밝습니다. 만약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심혈관질환이나 소화 장애, 소변불리(小便不利), 신경통이나 변비, 불면증,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만은 편하다고 주장해도 몸이 불편하면 마음도 불편해집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 말입니다. 카르마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믿음이 위험한 이유는 눈 밖에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는 것만을 믿고 있는 한, 거기에 평화와 안정은 없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지킬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믿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진리(안에 있는 것)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긴 적이 없으므로 사라지지도 않고, 그것은 때가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찾은 것을 "깨달았다", 혹은 "聖靈이 임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찾을 필요도, 얻을 필요도, 임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