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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은 꽃이 피어나듯이, 멀리서 종소리가 귀를 울리듯이, 애씀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문이 열린다. 깨달음을 위해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대로 깨달음이다. 지금 여기, 시절 인연(時節因緣)을 만나라. 깨달음은 여기 이렇게 늘 있는 것(如如)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고, 텅 비어 있으며, 고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애씀이 필요치 않다. 진실(眞實)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고만 한다. 깊은 삼매에 들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이 안 된다며 사회를 떠나고, 쉽게도 무문관(無門關)에 들고, 생각 없이 용맹정진(勇猛精進)에 돌입한다. 그렇게 해야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 믿는다. 애를 쓰는 것은 나무랄 생각은 없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에고를 죽여야 한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Ego를 버리고 죽이기에 앞서 Ego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에고는 나 자신(自我)을 가리키는 철학적 표현으로,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의 내용이 변해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라 하면 통상 이기주의자를 가리키지만, 세상에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 아닌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외치고 싶다. 에고는 버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에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지(無知)가 문제다. 공부라는 것은 에고를 갈고 닦아 본래의 성품(性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에고 따로, 性品 따로가 아니라, 그 둘은 하나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팔이 둘이지만 한 ..
선악은 둘이 아닙니다. 善이 없어서는 惡이 있을 수 없고, 惡이 있음으로 善도 있기 때문입니다. 밝음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있음과 없음, 편리함과 불편함, 넉넉함과 부족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받쳐주는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見性이란 '하나'임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상반되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로부터 연유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싸움에선 선이 이겨야 하고, 추함보다는 아름다움이, 불편보다는 편리함이, 부족함보다는 넉넉함을 더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천지신명(天地神明), 본래면목(本來面目), 공(空)으로부터 출현했음에 늘 어둡지 않으면서도 마음은 더 좋은 쪽 편에 서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모순적인 것 같아도, 그것이..
보는 자와 대상(對象)은 둘이 아니다. 그 둘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주체(主體)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엄연히 그것들은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작용에 의해 그 둘은 동시에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선도(仙道)에서는 그것의 주체를 기(氣)라고 한다. 氣가 없이는 주체가 있기는 있되 주체라 할 수 없고, 대상이 있기는 있되 대상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주체가 대상을 만날 때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묘(妙)한 것이 있는데 선가(禪家)에선 그것을 영지(靈知)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 뒤에는 그것을 작용시키는 에너지가 활발발(活潑潑) 하고 있다. 仙道에서 氣를 중시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작용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무엇도 생..
소주천(小周天)은 에너지(氣)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하는 수련입니다. 그것을 통해 의식(意識)과 에너지를 동시에 수련합니다. 견성(見性)을 이룰 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너지가 발동(發動)됩니다. (일시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자성(自性)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알기 위해서는 꼭 상대가 필요합니다. 의식과 에너지의 메커니즘을 통해 의식과 에너지의 존재가 동시에 드러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속에는 에너지의 작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마음(의식) 역시 없습니다. 의식에 에너지(氣)가 활성화(活性化)되면, 작용력(作用力)을 가집니다. 에너지가 비활성(非活性) 상태에 있으면, 조화(造化)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의식(意識)이 일어나면 에너지도 활성화됩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 믿음으로 끝난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는 싹이 터서 잘 자라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바람이 심해도 웬만큼 불다 말 것이라는, 억수 같은 비도 며칠을 못 넘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는 바르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딸을 사위에게 맡길 때는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신앙(信仰)'은 다르다. 믿음과 신앙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믿음은 상대적이지만, 신앙은 절대적이다. 신앙은 믿음과는 근본부터 다른 아주 위험한 것이다. 신앙은 분별력을 마비시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겉으론 미소를 보이지만 자기가 믿는 것 외엔 모두 거부하게 만드는 아주 독선적인 것이다. 나중에 그것들이 모두 위선(僞善)이며 사기로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무위(無爲)란 '함이 없다', '애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기는 하지만, 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도가(道家)에서는 無爲에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의 자연(自然)을 붙여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휘달리지 않고, 쫓기지 않고 살게 됩니다. 그대로 신선(神仙)의 삶입니다. 계율(戒律)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따로 보시행(布施行)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절로 그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대로 自然無爲입니다.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실상 정견이 확보되고 나면 공부는 마무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견(正見), 즉 바른 시각(視覺)과 바른 견해(見解)가 확립되면, 그다음의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정견(正見)은 사실상의 깨달음입니다. 바탕 의식을 보고(見性) 그 자리에 쉽게 머물 수 있게 되면,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사물과의 관계는 이미 원만함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팔정도의 시작에 정견(正見)이 있습니다. 애써 닦은 결과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은 결코 아닙니다. 먼저 깨닫고, 그 후에 닦아가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가 여러모로 맞는 말입니다.
에너지(氣)를 길러 태식(胎息)을 이루면, 에너지와 식(識)을 동시에 지닌 양신(陽神)을 얻습니다. 陽神은 단순한 생각(識) 덩어리인 유체(幽體)와는 다르게 작용력이 있습니다. 보통 말하는 유체이탈과 양신(養神), 출신(出神)은 개념(槪念)부터 다릅니다. 양신(陽神)과 대별되는 것으로 음신(陰神)이 있는데, 그것은 작용을 위해 남의 에너지를 빌려 사용합니다. 자기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신앙(信仰)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수행을 통해 양신(養神)을 하는 무리를 우도방(右道房), 음신 차원에서 주문(呪文), 기도 등으로 타력(他力)을 빌려 행사하는 무리를 좌도방(左道房)이라고 합니다.
견성(見性)을 하고 나면 편안해집니다. 그 후에는 더 알아야 할 것도, 얻어야 할 것도 없음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가끔,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 세상을 비관(悲觀)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떠한 관(觀)을 가지고 사느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자유입니다만... 見性을 했다고 하는 이들 중 일부는 명(命) 공부, 즉 에너지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생사(生死)의 자유도 얻었으니(究竟涅槃), 구구한 삶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며 은근히 기(氣) 공부하는 선도인(仙道人)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깨달음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모두라면 보시(布施)는 왜 필요하며, 지계(持戒) 인욕(忍辱)은 무엇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