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힌두(Hinduism)는 태초에 존재(存在)와 비존재(非存在) 사이에서 제일 먼저 에너지가 생겨났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신(神)들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선도(仙道)는 에너지를 먼저라 하지 않는다. 허(虛)에서 신(神)이 나타나 에너지(氣)가 생겨나며, 물질(精)은 에너지(氣)가 모여서 생긴다고 가르친다. 神(意識)과 에너지는 동시에 출현한다. 그것은 수련해보면 누구나 체험한다. 에너지(氣) 없이 의식(神)은 결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의식이 없는 에너지 역시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품(性品)은 神의 성질과 氣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氣를 수련하고 그것을 기초로 깨달음으로 진행하는 것과 그 자리(自性)을 먼저 알아채고 나서 氣 수련을 진..
지식은 책이나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스승을 직접 만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평생을 교육받아온 것이 깨달음과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스승과 눈을 맞추고, 그의 氣를 받으며, 납득이 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는 당신으로부터 어떠한 물질적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이유는 오직 당신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를 찾은 당신은 福이 많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사는 사람 가운데 깨우친 스승과 마주 앉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는 당신의 심중(心中)을 꿰뚫어 본다. 그의 앞에선 옷깃을 여미고, 오직 깨달음에 대해서만 묻고 답하라. 언제 또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
바른 견해를 가리켜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그 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그다음 팔정도(八正道)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본래면목'을 본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정견을 얻은 사람은 당연히 '정사유(正思惟)'를 하게 됩니다. 치우치지 않는 말(正語)을 하게 되고,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을 갖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바른 수행(正精進)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바른 알아차림(正念)을 하고, 바람직한 삼매(正定)를 즐깁니다. 복잡할 것 없습니다. 선도 생각지 말고(不思善), 악도 생각지 않으면(不思惡), 바로 정견 자리로 인도합니다. 정견(正見)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시작이며 마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는 '무아(無我)'이다. 반면, 힌두교와 대승불교 사람들은 '아트만(Atman)'과 '자성(本來面目)'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각자 자기주장이 옳다고 끝이 없는 논(論)을 펴지만, 과연 양쪽 모두 관념(觀念)의 한계를 벗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이른바 무아론(無我論)과 진아론(眞我論)이다. 한쪽은 2500년 전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알려진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신봉하고, 다른 한쪽은 체험을 통하면 무아(無我)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확연(確然)하므로 그것을 '진아(眞我)', 또는 '자성(自性)'이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상호의 주장이 모두 일리(一理)가 있는 데다 첨예(尖銳)함으로 결론은 후일로 미..
이 세상이 꿈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사는 것이 허망(虛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꿈을 바꿔 꿀 수 있어야 하고, 실(實)답게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의 가르침을 따라 인류를 멸망시키고 말아야 하겠습니까? 어서 관념(觀念)의 늪에서 나오세요. '허무(虛無)의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꿈같고 허망한 세상을 바꿔 살지 못하면 깨달음은 얻어서 무엇한답니까? 다음번엔 이슬처럼 사라지는 꿈을 다시 꾸게 될 텐데 말입니다. 虛無에 빠지고 비관에 허덕이다가 자살한 일본의 '무묘앙에오'처럼 살아야 하겠습니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중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는 없을까요? 자성(自性)을 깨우친다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을 읽고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겠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스승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빨갛게 물든 가을 산이 스승이 될 수 있고, 요란하게 소리 내며 나는 기러기 떼, 주방의 은은한 된장찌개 냄새, 창문을 열었을 때 밀려드는 시원한 바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제일은 지금 나와 대화가 가능한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그의 앞에 조용히 앉아 가르침을 구하십시오. 끝장을 낸다는 마음으로 묻고 또 물으십시오. 그가 귀찮아할 거라는 생각은 접으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의 형편을 생각할 처지가 아닙니다. 100일 기도 대신에 스승을 백일 만난다는 각오로 임하고, 그리하고도 별 성과를 못 얻으면 야멸차지만 다른 스승을 만나십시오. 임제(林悌)도..
서울 사는 사람이라 해서 모두 남산 팔각정에 가본 것은 아니며, 대장간 집 식구라 해서 모두 호미나 괭이를 잘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개 본 적 있습니까? 종일 화두(話頭)를 들고 앉아 있다고... 오래오래 삼매(Samadhi)에 들어 있다고만 해서 꼭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깨닫겠다는 확실한 의지(意志)와 코드가 맞는 스승, 그리고 시절 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해야 깨닫는 법입니다. (전도서 9:11) 견처(見處)를 얻고 난 후에도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애써 얻은 그 자리가 방심하는 사이 유실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 여자였던 선녀(仙女)가 아기 둘을 안고 승천(..
깨달음을 위해선 일단 생각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견성(見性)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집중(attention)입니다. 일단 다른 생각들을 보류하기 때문입니다.선사(禪師)들이 갑자기 제자의 귀를 잡아당기거나, 코를 비틀고 몽둥이를 날렸던 이유도 생각을 내려놓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물론 나중엔 그것이 "뜰 앞에 잣나무", "수미산", "마 삼근"으로 대체 되었지만 말입니다.혜능(慧能)이 말한 "선(善)도 생각지 말고, 악(惡)도 생각지 말라" 한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길을 잘 못 들어섰으면 일단 멈춰서야 합니다.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은 멈추지 못하는 한, 자성(自性)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생각을 멈출 수만 있으면 바로 진면목(眞面目)을 보게 됩니다.그래서 '세수하..
불교(佛敎)에 깨달음이 없고, 기독교에 성령(聖靈)이 없다면, 그것은 속 빈 강정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다. 중에게 깨달음에 관해 묻고, 목회자에게 성령을 물었을 때, 반가워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친절히 대답에 임하면 그는 바른 스님이요, 바람직한 목사님이 분명하지만, 만약 얼굴에 당황함이나 불쾌함을 나타내거나, 귀찮아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려 한다면, 그는 돌중에 땡초요, 먹사에 삯꾼이다. 불교의 '불(佛)' 자는 깨달을 佛이요, 성령이 안 계시는 교회는 마귀 소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성령은 한통속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어딘가로부터 강림(降臨)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텅 비워 심령(心靈)을 가난하게만 해주면 저절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道)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言語道斷)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나는 존재합니다. 道가 무엇인지는 말하는 순간 틀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은 학인(學人)에게 마음을 내어놓으라든지, 고함을 친다든지, 들고 있던 몽둥이로 내려친다든지 하는 비상식적인 짓을 하는 겁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道를 말하라 해서는 안됩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들은 道와 씨름하는 대신에 기(氣)를 공부합니다. 이기(理氣)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