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신앙(信仰)과 종교(宗敎)를 혼동(混同)하여서는 안 된다. 종교와 신앙의 혼동에서부터 인간사의 모든 불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앙은 다르다. 신앙은 믿어(信) 우러르는(仰) 것이며, 종교는 최상(宗)의 가르침(敎)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종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무나 개, 고양이, 소를 신앙할 수 있다. 형상물(形象物)이나 가상(假想)의 것을 만들어서도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가르침이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서로 자기들의 가르침을 종교라고 주장한다. 최고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러러 받들어 믿으면(信仰) 이미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마땅히 하느님, 부처님..
예수는 요한이 베푸는 요단강 침례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확인했고, 싯다르타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고민 끝에 결국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나란 것은 없다(無我)"를 깨달았다 하며, 최재우, 강일순, 문선명은 자신이 하느님이란 걸 스스로 깨달았다고 전합니다. 난 내가 하느님인지, 하느님 아들인지에는 관심이 없지만, 50년 공부로 깨닫게 된 것은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며, "의식과 氣"만이 변치 않는 "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깨닫고 싶습니까? 하느님보다는 하느님 아들임을 깨닫는 것이 좋겠지요. 재벌보다는 재벌 아들이 더 모양 날 것이니까요. 하지만 33살에 참혹하게 피살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군요. "나는 없다"라는 말엔 할 말이 없군요. 자기가 없다는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하겠습..
독재자는 종교인을 피하고 싶습니다. 정치인은 신앙인을 좋아합니다. 종교인은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고, 신앙인은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두려움이 없어서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시키는 대로 말을 듣습니다. 독재와 종교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밑거름으로 하여 자라나는 것이 독재입니다.
정치권의 갈등에 대해 대학생들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들고 거리로 나섰답니다. 왜 누군가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솔직히, 누군가를 믿고 살아 본 적은 있습니까? 바보 아닙니까? 왜 누구를 믿고 삽니까? 그동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정말 누굴 믿고 살았었습니까? 왜 자기를 믿고는 살지 못합니까? 왜 자기를 살피고 단속하면서는 살지 못합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을 왜 자신에게는 적용하며 살지 못합니까? 꼰대들하고는 무언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꼰대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합니까? 그것도 그들 책임입니까?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누군지 나의 정체성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나와..
깨달았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유튜브(YouTube)를 조금만 살펴보면 이젠 개나 소나 깨닫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깨달음이 모두라고 생각한다. 한 소식 얻은 것으로 이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한가한 道人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무엇을 매개(媒介)로 우리가 살고 있으며, 무엇이 매개되어 그를 깨닫게 했고, 무엇이 그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해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깨닫고 나서도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에너지, 즉 氣이다.
무슨 옷을 입느냐, 무엇을 먹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옷이 그 사람이 아니며, 먹는 음식이나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옷을 입든, 무엇을 먹든, 어떤 집에 살든, 이것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찾아 그 사람(本來面目)과 친해야 합니다.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누군가는 돈이 최대의 가치일 수 있으며, 주먹이... 지위가... 명예가 최대의 관심사일 수 있습니다. 또한 소박하게 가족끼리 화목하면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소수이기는 하나, 자각(自覺), 즉 '무엇을 '나'라 알고 살아야 하는가?'가 주관심사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평생을 망상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에서 시작해 나에서 끝납니다. 돈이든, 권세든, 명예든, 모든 것의 중심엔 언제나 내가 있습니다. 늘 그것을 잊지 않고 나를 깨우치며 산다면 그것이 신선(神仙)의 삶입니다.
아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그냥 알 뿐이다. 믿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저 믿을 뿐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눈뜬 사람보다 더 선명히 본다고 착각하고 산다. 믿음은 도박이다. 처음엔 약간 이익을 보는 듯해도, 결국엔 전 재산과 목숨까지 잃어야 끝난다. 믿음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것"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꿈속 궁전에서 사는 것과 같다.
한 번쯤 신선(神仙)처럼 살아 보는 꿈을 꾸어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속절없이 나이만 먹다 보면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山에 홀로 사는 사람 TV 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하지만 혹시나 하다가도 역시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사람들의 로망을 일부라도 충족시켜 주자는 시도이겠지만 소개되는 내용이 神仙의 삶과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山에 산다고 하여 神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약초를 캐고, 계곡물에 몸 좀 담근다고 무슨 대수인가? 神仙의 길(仙道)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는 길은 아니다. 神仙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스러운(?)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물과 권력에만 의존하며 살지 않고, 그보다 더 본원적인 자기 속의 ..
깨달음을 얻고 나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아채는(見聞覺知)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 임을 알게 된다. 창밖의 까치 소리가... 갓 뽑아낸 커피 향, 혀에 감도는 쌉쌀한 맛이...山을 휘감고 도는 안개 무리와 그에 대한 사랑의 확인 하나하나가 깨우침의 자료가 된다. 그렇다고 자기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먹고 마시는 것에 심취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무디어지게 마련이고, 나를 다시 악몽(惡夢)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기운(氣運)의 수련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청정(淸淨)하게 해주는 묘약(妙藥)이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견인차의 구실을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