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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두려움, 공포 속에 있게 만든다.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움직일 때, 우리의 마음은 수치스러웠다가, 들떴다가, 의기소침했다가, 왔다 갔다 한다. 후회는 과거의 소산이고, 불안과 초조는 마음이 미래로 이동할 때 일어난다. 깨달은 이의 마음이 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마음이 늘 현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불안과 공포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허깨비라는 것을 직시(直視)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이호랑이나 딱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던가?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실재(reality) 속에 산다. 그러므로 가상(假像)이나 가설(假說)로는 그를 속일 수 없다. 그에게 세상은 유희(遊戱)에 불과하다. ..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을 가리킬 때 보통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空은 비어있지 않으며,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어있다면 거기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식물이 자랄 수 없고, 물고기가 헤엄칠 수 없으며, 새가 날 수 없고, 온갖 동물들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空 위에 펼쳐지는 세상만사(世上萬事) 뒤에는 언제나 에너지, 즉 氣가 함께 합니다. 그 기초 위에 사회가 생기며, 문화가 펼쳐지고, 경제가 활성화하고, 정치가 일어납니다. 空은 만물이 일어나고 꺼지는 바탕이며, 그것의 핵은 氣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氣를 불어넣어 사람을 살게 했다고 했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은 空이 곧 물질계(色), 즉 눈에 보이는 현상, 그리고 마음작용(受想行識) 모두라고 말합니다..
仙道에는 깨달음이란 말이 없다. 단지 小周天만을 강조한다. 선도의 모든 행법은 소주천을 向하고 있다. 소주천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전신(全身)의 에너지(氣) 타통과 부족함이 없는 넉넉함이요, 다른 하나는 실재(實存)를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다. 仙道의 개안(開眼)이란 바로 안목의 회복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육안(肉眼), 즉 물질계를 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비물질계, 절대계(絶對界)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인간이 영장(靈長)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靈眼(神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見性이 불가능하며, 또한 얻어진 깨달음 역시 유지하기 어렵다. 眼目을 얻는데 소주천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이 선도에서 소주천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내 신앙(信仰)이며, 종교(宗敎)입니다"라는 말로 진리로부터 피하는 사람이 배운 사람 중에도 너무 많습니다. 진리(眞理)를 추구하는 것만을 가리켜 宗敎(꼭대기 가르침)라 할 수 있습니다. 대상(對象)을 믿고 그것에 경배하는 신앙 형태를 종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對象)은 바뀔 수밖에 없게 마련이고, 眞理는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宗敎라는 이름을 표방한 신앙 단체들은 말로는 우상(偶像)을 터부시하면서도 우상을 신앙 형태로 하는 신앙 단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들이 그 상징물들을 가리켜 우상이라 하든 아니라고 주장하든 말입니다. 삼독(三毒: 貪嗔癡)에 찌들어 있는 대중은 우상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이게 하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이 필요할지 모릅니..
'깨달음은 불교(佛敎)에만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석가모니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깨달음을 발견한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누구라 할지라도 당신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가리고 있는 이 생각들을 잠시 쉬게만 하면 즉각 그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깨닫고 말 것입니다. 깨닫지 않고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쥐어박히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간단합니다. 내..
깨달음이란 자성(自性)을 깨우치는 것, 이른바 견성(見性)입니다. 그것은 Oneness, 즉 Brahman과 Atman의 합일(合一), 그리고 알라의 품에 안기는 것이며, 이기(理氣)의 일원(一元)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늘 하느님과 함께(Immanuel)입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모두가 깨달음의 방편입니다. 깨달음은 서울에 입성(入城)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동문으로 들어가든, 서문, 남문 어느 문을 통해서든, 우리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경전(經典)과 통합니다. 어떤 성인(聖人)의 말씀이든지 그 의미가 저절로 가슴에 전해집니다. 신앙(信仰)은 진리(眞理)가 아닐 수 있습니다. 고로 신앙을 통해서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신앙인들은 오직 자기가 신봉하는 것만을 진리..
氣는 생각보다 먼저다. 氣는 영원하다. 하지만, 에너지(氣)는 언제나 의식(神)과 함께한다. 물질(精)도 氣가 받쳐주지 않으면 존재하기 어렵다. 사람은 정기신(精氣神)이 결합한 존재다. 그 존재의 중심에는 언제나 氣가 있다. 氣가 빠져버리면 精도 神도 존재가 불가능하다. 神과 氣가 합쳐 독특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고, 精과 氣가 합쳐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氣의 작용 때문이다.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氣이다. 선도(仙道)에서 진리(眞理)보다도 氣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은 그런 이유다. 氣가 없으면 진리(眞理)도 행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타통된 것을 小周天이라하고, 나머지 脈들이 모두 열리는 것을 大周天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氣와 주천(周天)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입니다. 국도나 지방도가 열리지 않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없듯이, 팔, 다리, 전신에 퍼져있는 氣脈들이 통하지 않고 임맥과 독맥만 활성화될 수는 없습니다. 축기(蓄氣)가 없이 단순히 의념이나 호흡만으로 이룬 소주천(?)은 실효가 없습니다. 외단공(外丹功)을 하면 의념이나 호흡 수련보다 축기에 더 효과적입니다. 소주천을 이루고 나면 심신에 변화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정상을 찾습니다. 전신의 기맥들이 그것에 부응하여 열렬히 반응합니다. 마치 남북의 지도자가 지나가는 길에 도열한 평양시민들처럼 말입니다. 小周天은 氣의 힘으로 ..
깨달은 사람은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부처라는 것,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의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부처라는 것,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분한 마음, 시기, 질투가 없습니다. 탐심이 없고, 성내는 마음이 없으며, 어리석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부처요,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는 있어도, 썩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치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인데, 마음이 부처라는 것(卽心是佛), 우리, 즉 내가 神(요한 10:34. 시편 82:6)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그에겐 기쁨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든 갖지 못했든..
"만물박사(萬物博士) 집에 끼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생활에는 적용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Bible을 늘 옆에 끼고, 불경(佛經)을 줄줄이 외우며 살아도, 자기가 부처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학식 많은 유대의 율법 학자들은 예수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하느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몇십 년을 교리(敎理) 공부를 하고, 선방(禪房)에서 수십 철을 살았지만, 아직 깨달음 뒷다리도 못 잡은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너무 공부가 높아서, 아는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믿음이 약하고, 그들 가운데 깨달은 이의 숫자는 "가뭄에 콩 나기"입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