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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우리가 이미 깨달은 부처이듯이, 누구나 氣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仙道에 入門하여 지도자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단기간에 어렵지 않게 氣 체험을 한다. 그것은 마치 부처 공부를 하는 스승의 '할'이나 '방', 그리고 '뜰 앞의 잣나무' 소리에 담박 그 자리를 체험(言下頓悟)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사심(私心)을 내려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지만... 초견(初見)을 이룬 사람이 갑작스러운 질문이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나면 즉답을 하지 못하고 흔들리듯이, 氣 수련도 덜 익은 상황에선 다소 의심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見性 이후 상당한 보임(補任)을 거친 후 비로소 불퇴전(不退轉)을 이루듯이, 氣 수련 역시 득기(..
깨우침을 얻으면(開眼)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무상(無常)'이 실감 납니다. 저절로 탐내는 마음(貪心)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게 됩니다. 당연히 성내는 마음(瞋心)이 힘을 잃습니다. 어리석음(癡心)에서 벗어나 경전(經典)이나 선지식(善知識)의 글이 이해되고, 화두(話頭)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한 자성(自性)을 그들이 무아(無我)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근심 걱정이 사라져(無苦) 명실상부한 안식(安息)을 누리게 됩니다. 죽어서 간다는 극락과 천국이 지금 바로 펼쳐집니다. 그것이 견성(見性)입니다. 그 후부터는 "이것 때문에 살았었구나!"를 절실히 느끼며 살게 됩니다.
깨달음(見性)을 얻었는데도 아직도 불만이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깨달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는 말하길, 깨달음도 네 단계(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층차가 있으며, 보살지(菩薩地) 역시 십 단계가 있다. 보통 10년에서 30년... 수행을 늦추지 말라는 말은 그런 연유이다. 두 번째, 에너지(氣)가 막혀 있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에너지가 필요하며, 그것에 문제가 있으면 기능 장애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仙道는 깨달음 공부보다 에너지 공부에 더 비중을 둔다. 우리는 하나같이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얻게 되면 깨달음은 빠른 시간 내에 크게 진보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실재(實在)하는 것은 오직 "지금" 뿐이다.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허깨비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하라. "내가 지금은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할 테니 기다리라"는 말은 하지 말라. 그리 말하면 사람이 값싸 보인다. 그리고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생각 속에 있는 대로 행동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곳에 우리는 있는 법이다. 천국에 살고 싶은가? 천국에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천국에 살라. 속지 말라. 천국은 죽은 후 가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국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성(性)은 명(命)이 있어서 性이고, 命은 性에 근거하여 命이며, 기(氣)는 이(理)가 있어 작용하고, 理는 氣를 근거로 행세한다. 또한 혼(魂)은 백(魄)이 있을 때 魂이며, 魄은 魂이 함께 할 때 모양을 갖춘다. 깨달은 자, 오직 性만을 주장하는 주리론자(主理論者)도 배고프면 밥을 먹고, 아프면 약을 찾는다. 입만 열면 일체(一切)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夢幻泡影)라고 하지만, 그도 먹고 잠자지 않고는 살 수 없다. 性을 알면 命을 알아야 하고, 性을 깨우치고 나면 命을 닦아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각각이 아니다. 로미오만 읽고 줄리엣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로미오만 실재(實在)하고 줄리엣은 허깨비라 해서는 안 된다. 줄리엣이 허깨비라면 로미오도 허깨비요, 로미오가 진실이면 줄리엣도 진실이기..
사람은 누구나 깨달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는 말도 있다. 이제는 그런 정도는 누구나 아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 공유화의 시대, 우리는 스마트폰만으로도 원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개벽(開闢)이라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깨달음의 체험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집을 한 채 사서,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신 것만으로 "이 집은 당연히 내 집이다"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산 집을 남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 등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내 집임을 분명히 하려면 법원에 가서 과연 이 집이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버지가 "네 집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내 집은 아닐 수..
깨달음이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막혔던 氣가 열리기 때문이다. 강한 기감(氣感)을 느끼기도 하고, 氣가 전신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깨우침이 몸속 기운을 깨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理致)로 알음알이만을 키운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깨우침은 머리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초견(初見)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두워지는 이유는 에너지와 연결을 못 했기 때문이다. 깨우침과 氣(小周天)를 동시에 얻은 사람은 그다음부터의 공부가 점점 더 재밌고 풍요로워진다. 그런 사람은 나머지(補任) 공부를 수월하게 하게 된다. 氣의 작용이 그 자리가 흐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도(仙道)에서 "본성(本性)과 에너지를 동시에 닦으라(..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위해선 모든 노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랜 기간 애를 쓰고도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노력해야 얻어진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여(眞如) 자리는 변함이 없이 언제나 여여하며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내려놓고(don't think) 보기만 하면(just look) 바로 드러나는 것이 본래면목입니다. 하지만 명(命)의 자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며, 관리를 소홀히 하면 엉클어지기에 십상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깨달음 자리는 너무나 당연하며 命을 닦는 과정에서 기(氣)를 잘 닦아 가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명쌍수(性命雙修)가 올바른 수행법입니다. 그 말은 '너무 ..
깨달음은 이해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깨달음은 체험(體驗)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는다. 먹어봐야 맛을 알기 때문이다. 체험이 없다면 확신이 없다. 그럴 경우는 단지 남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럴 거야~" 하는 수밖에 없다. 남이 밥 먹는 거 백날을 쳐다봐도 나는 배부르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르거나 그것이 바로 자신(眞如)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치 꿈을 꾼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 천상(天上)에 잠시 다녀온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체험도 필요하고, 깨달음 후 공부를 통한 확실한 이해도 필요하다. 기억이 사라질 정도로 너무나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으므로 자주 집의 곳곳을 살펴봐야 한다. ..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문빗장을 만져 보아라!" '앞으로 스님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경봉(鏡峰) 스님의 답이었다.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 그가 말한 가장 명쾌한 답이 아니었을까? 향기에 취할 때, 맛난 것을 먹을 때, 부드러운 것을 만질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왜 그럴까? 깨달음의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chance)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 순간 당신이 깨어있다면 즉시 본래면목(깨달음)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돈오(頓悟)라 한다. 깨어있음이란 잡념들에서 벗어나 있는 순수의식이다. 夜半三更 문 빗장을 만질 때 당신은 어떻게 될까? 아무 생각도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