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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에고(ego)가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Epoche(에포케, 판단 중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는 살기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
마음을 운전하려면 운전자가 있어야 하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차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마음을 운전하려면 먼저 그 운전자가 누구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차는 운전자가 목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달음, 즉 자각(自覺)을 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음의 힘을 발휘하여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군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실히 검증하지 않으면 평생토록 안개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 만을 믿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과거에 있었다는 사건과 전혀 검증이 불가능한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절대성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현재 밖에는 없습니다. 과거는 영원히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실재(實在)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하늘, 땅, 세상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모든 것을 재는 척도(尺度)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에 근거하여 무엇인가를 믿든지 말든지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부터 바르게 정의 내려야 하며, ..
예수가 제자들에게 널리 전하라고 한 good news(福音)는, "그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고(요한 11 : 25), 혹 죽는다면 천국에 살 것이다"였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자기(眞我)가 누군지를 깨우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얻으면 스스로 자기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확인하라고만 합니다. 물론 확인하고 안하고는 당신의 자유이지만 말입니다.
問: 깨달으면 운(運)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았기에 운이 바뀌는 것입니까? 운이 바뀌었기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答: 그 질문은 인과(因果)만 생각하고 연기(緣起)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과란,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을 말하는 one way입니다. 하지만 연기란 쌍방통행입니다.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B가 있으므로 A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즉, 깨달음은 도통운(道通運)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어나기 어렵지만, 반면에 깨달음 인연이 왔다는 것은 도통운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도통(道通) 공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도통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통운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
깨달음이란, 자기 성품(性品)을 만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자성(自性)입니다. 초월적 힘을 받더라도 받을 "내"가 있어야 합니다. 받을 "나"가 분명치 않으면, 초월적 힘이 오더라도 어느 자리로 내려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이고, 소중한 것은 '진여자성(眞如自性)'입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늘 위아래에 홀로 존중받는 존재(天上天下 唯我獨尊)입니다. 나를 깨우치는 순간, 선계(仙界)로 이동하여 불멸(不滅)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자유로움 속에서 거리낌 없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근심 걱정이 가라지고,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만끽하게 됩니다. 깨달은 것은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철저히 깨우친 것이므로, 그다음부터는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걱정하는 놈이 없고, 괴롭기는 괴로운데 괴로운 자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걱정하는 자가 없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철저하게 규명해야 합니다. 보는 자가 없다면 어찌 보이는 대상이 있겠으며, 듣는 자가 없는데 어찌 들리는 대상이 존재하겠습니까? 근심 걱정인들 어떻게 혼자서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걱정은 걱정이 아니고,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게 됩니다. 텅 빈 속에 영성(靈性)만이 여여(如如)합니다.
깨달음(頓悟)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解悟)하지 못한다면 돼지가 진주를 목에 건 것과 다르지 않다. 돈오(頓悟)와 해오(解悟)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삶에 제대로 적용(證悟)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백만장자가 자기 돈을 토지나 은행에 묻어두고 빈곤하게 사는 것과 같다. 頓悟를 이루고 나서 다시 스승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아직 혼자 힘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頓悟가 있었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 경전(經典)들을 가리지 말고 두루 섭렵해야 하고, 선배 수행자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은 수포가 된다.
분별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와 둘, 너와 나, 산과 바다를 구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무엇에라도 선악(善惡)의 딱지를 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것이 원죄(原罪)가 되는 것이다. 세상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선악은 당신의 에고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 되면 그대로 견성(見性)인 것이다.
진리(眞理)가 우리의 관심사이건 아니건, 우리는 시종일관 진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이래 진리는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어 왔으며, 진리를 구하려 일부러 역경에 들어가며, 진리를 지킨다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까지도 버려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작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허탈할까? 진리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진리로 먹고, 진리로 자며, 진리로 인해 세상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탐구할 수 있는 것도, 신앙해야 할 것도, 애써서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있는 이것'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채는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