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왜 그 자리를 주인공이라 하는가? 그 자리는 시공(時空)을 초월하며 三界(慾·色·無色)의 주인, 근경식(根境識)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성품(性品)이라고도 하며, 그 자리를 본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그 자리는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여기에 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경계(境界)와 따로 놀지 않고 경계(色聲香味觸法)가 일어날 때 함께 드러난다. 세상에 그 자리를 알아챈 것보다 더한 공덕(功德)은 없다. 그 자리는 세상사의 주관처이며, 그 자리를 만난 후부터는 境界를 따라 불편하게 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희귀(稀貴)하다. 늘 그 자리를 지키며(補任) 살아야 한다. 그 자리만이 실재(實在)이며, 그 자리가..
생각으로 하는 소주천(小周天), 일명 의념주천(意念周天)은 겉모양만 잡은 것이어서 주천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축기(蓄氣)를 기반으로 최소 임독맥(任督脈)을 포함 기경팔맥(奇經八脈)이 통해야 비로소 소주천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YouTube나 인터넷 등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이것이다"라고 정리된 것을 가지고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을 위해선 견처(見處)가 확실해야 합니다. 최소 10년, 20년 이상 보임(補任)을 하고, 증오(證悟)까지 이루어 보시(布施)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단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탕으로 깨달았다 주장하여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
신(神)이란 볼 시(示)와 납 신(申)의 복합으로 되어 있는 글자다. 그러므로 道 차원에서 해석하는 神은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神과는 전혀 다르며, 근소하지만 마음과도 다르다. 깨달음으로 해석한 神의 풀이는 다섯 개의 창문이 달린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示) 원숭이(申)이다. 선도(仙道)의 모든 행법은 시종일관 神과 氣를 한데 묶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오래전부터 그것을 장생불사(長生不死)의 근거로 삼아왔다. 죽음이란 혼비백산(魂飛魄散), 즉 정기신(精氣神)이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神을 영어로 굳이 표현한다면 Awareness, 즉 자각(自覺)이라 할 수도 있으며, 견성(見性)을 神과 연관하여 표현하면 神을 본 것 즉 性을 파악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선 생각들을 많이 비워져야 한다. 논리(..
깨어있음이란 시선(視線)이 자성(自性)에 머무는 것입니다. 듣는 것과 느낌들이 실재(實在)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보이고 들리는 외부로만 향한다는 것은 잠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삶은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왜 사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휘둘리기만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는 청정한 삶을 삽니다. 생각에 이끌려 살지 않고, 그것을 조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바깥 경계에 휘둘리며 사는 삶은 내 삶이 아닙니다. 백 년을 살았다 해도 한순간의 꿈보다 못합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것보다 더 큰 신통력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
자성(自性) 자리에 대한 체험도 분명하지 않으면서 단지 책이나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서 깊은 고찰(考察)도 없이 듣고 읽은 이야기를 꿰어맞춰 존재(存在)에 대해 무(無)니, 유(有)니,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몇 편을 본 후 일어난 환(幻) 체험을 깨달음으로 오인하여 깨달은 사람 행세를 하며 남을 가르치려 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에고(ego)에 취해 궤변(怪變)을 늘어놓으면서 논리적인 이야기는 모두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섭섭하더라도 대화를 중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 낭비이니 말입니다. 자기의 독선적(獨善的) 이야기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적반하장격으로 모든 이가 틀렸다고 몽니를 부리기도 합니다. 무아(無我)에 대..
의수단전(意守丹田)과 소주천(小周天)을 통해 신(神), 즉 의식(意識)과 기(氣)는 하나가 되고, 그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태식(胎息)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때 모든 것은 하나가 됩니다. 胎息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고,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안목(眼目)은 단전(丹田)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이 신안(神眼)이 됩니다. 그때 氣는 사랑이 되며, 氣를 알아채는 것이 깨우침이 됩니다. 거기에는 神도 없고, 氣도 더 이상 없어져 모두 하나가 되고(此兩者同) 맙니다. 함부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말을 하는 순간 깨달음과 깨달은 자는 둘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자성(自性)을 보는(見) 순간, 그 자리(空寂)와 알아챔(靈知)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경전(經典)을 끌어다 붙이고, 선지식(善知識)의 노래나 따라부른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늑대가 어쩌다 호랑이 탈을 쓰고 있다고 하여 호랑이는 아닙니다. 토끼, 멧돼지가 나를 보고 도망간다고 하여 내가 호랑이는 아닙니다. 호랑이들이 나를 호랑이라 해줘야 비로소 호랑이입니다. 누가 나에게 맥없이 깨달았다고 했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한 점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석가모니도, 혜능(慧能)도, 임제(臨濟)도 깨닫지 못했다고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견성(見性)은 성(性)을 본 것(見)입니다. 性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어찌하여 조주(趙州)는 개에는 불성(佛性)이 없다(無) 했나요?
구원(救援)에 대한 해석은 종파별로 다르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구원은 타력(他力)에 의한 것과 자력(自力)에 의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타력에 의한 구원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신앙은 무조건적,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선 스스로가 죄인임을 믿어야 하며, 죄 사함을 해주신 대속주를 믿어야 한다. 조물주를 믿어야 하고, 그의 사랑과 그가 마련한 계획들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자력의 구원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의 정체성만을 확인(見性)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자각(自覺)을 이루는 순간,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타력의 신앙을 통해 구원받았음을 간증한다. 그러나..
동물 유전체학(생명과학) 박사학위를 줄 때 돌연변이, 즉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를 창조해 냈는지로 자격을 검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논문(論文)을 통해 합리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관문(關文)이 하나 더 있겠지요.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학인(學人)이 선지식(善知識)에게 인가(認可)를 청하면, 그는 우선 자신이 공부했고 깨달았던 경계를 가지고 학인(學人)의 깨달음을 가늠합니다. 그때 어떤 이에게는 단번에 시원한 認可가 내려지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선문답(禪問答)이 온종일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고도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최종으로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나 책에서 본 것은 쏙 빼고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로 답을 해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니에 털이 세 ..
견성(見性)과 소주천(小周天)은 선도(仙道) 교사의 필수 덕목입니다. 선도 교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야 하므로 본인부터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견성은 자성(自性)의 깨달음, 즉 자기를 아는 것이고, 소주천은 내 몸의 에너지를 통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견성과 소주천은 이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그 둘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 둘은 옛날엔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자동차 운전이 옛날엔 10년을 조수로 따라다녀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학원 한 달만 다녀도 누구나 하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견성과 소주천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관심사가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여기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