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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이리저리 살아보니, 인생은 결국 고통(苦痛)뿐인 거야" 그것을 안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좋은 것도 지나가고, 나쁜 것도 결국은 지나가고 만다는 것"을 안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이도 있고, "나라는 것이 있다고 따로 말할 만한 건 없어.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연결된 거야"를 외치는 사람을 가리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것이 과연 깨달음일까? 그런 복잡한 것 따지지 않고, 배고프면 아무 생각 없이 먹을 수 있고, 졸리면 죽은 것처럼 편히 잘 수 있게 된 사람이 진짜 깨달은 사람이 아닐까? 배 안 고파도 먹고, 졸려도 못 자는 사람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무사인(無事人)이 되어 사는 것 말이다.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깨달음'이나 '견성(見性)'이란 말을 들으면, 그것이 단지 불교의 것이라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와 'Father'가 다르고, 'money'라는 것은 '돈'이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된 것이며, 見性이란 자기의 성품(性品)을 본 것입니다. 불교인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동일하게 "자기(自己)"가 있으며, 性品이란 자기를 형성하는 주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기의 중심입니다. 기독교인은 성령(聖靈)체험이 바로 자기의 본체(本體)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특권입니다. 내가 아닌 별도의 신성(神性)을 설정하고 그것에 신앙을 바치는 것은 스스로 종속적인 삶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며, 해탈(moksha)에 대한 권리를 자청해 포기하는 ..
연료가 부족하면 엔진은 지속적으로 작동(作動)하지 못합니다. 축기(蓄氣) 과정이 없는 운기(運氣), 즉 소주천(小周天)은 전신(全身)의 기맥(氣脈)들을 활성화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주고받게 되어 있습니다. 에너지 공급이 멈추지 않아야 만물은 존재를 유지합니다. 인간의 의념(意念)은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氣)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면 意念 역시 지속할 수 없습니다.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蓄氣가 없이 意念만으로 기운(氣運)을 움직이려 하면 에너지 고갈과 함께 정신적 육체적인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蓄氣는 외단(外丹)과 내단(內丹)이 조화를 이루어야 무난히 완성합니다. 그래야 부족함이 없는 小周天도 가능해집니다. 물론 처음 小周天을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스..
깨달은 사람이 정규직이라면, 무명(無明)의 사람은 임시직에 비유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음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임시직에 있으면 절반의 임금에 승진 기회도 없이 남들이 기피하는 격무에 시달려야 하고 게다가 언제 해고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규직이 되고 나면, 우선 해고의 불안에서 벗어나며, 합당한 임금에 내가 하고픈 일을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쉴 수 있는 자유도 보장된다. 임시직에는 의무만 넘칠 뿐,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낼 수밖에 없지만 ... 깨닫고 나면 사물의 이치에 밝아지고, 늘 안락한 가운데서 감사할 일만 쉼 없이 일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
성명쌍수(性命双修)란, 성(性)과 명(命)을 동시에 닦아간다는 선도(仙道) 용어이다 性이란 깨달음의 자리, 즉 본성(本性)을 말하며, 命은 목숨과 사명(使命), 즉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 세계를 말한다. 불도(佛道)는 性을 중심으로 닦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仙道는 다르다. 희노애락(喜怒哀樂), 먹고, 자고, 쉬고, 놀고, 즐기는 생생한 이 삶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仙道는 견성(見性)을 따로 강조하지 않고, 命 공부 중심으로 공부를 지어간다. 性 공부를 중시하지 않는 이유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命 공부를 진행하는 가운데 깨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담박 밝아 보여주는 것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命 공부(백일축기, 시월양태)는 상당한 시간이 ..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깨달은(頓悟) 사람만이 깨달은(頓悟) 사람의 사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은 언어(言語)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어서 깨달으면 되는 일이고, 또한 모른다해도 세간(世間)살이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깨달음이 무르익으면 자신의 깨달음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한다. 언어의 마술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되는 일이 아니며, 깨달았다 할지라도 소양(素養)이 부족한 사람은 입을 다물거나 계속해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루한 소리만 할 뿐이다. 일단 돈오(頓悟)..
"낙천적(樂天的)이지는 못하더라도 낙관적(樂觀的)으로 살자"는 말이 있다. 낙천적과 낙관적은 어떻게 다른가? 낙천적인 것은 선천적(先天的)이고 낙관적인 것은 후천적(後天的)이다. 낙천적인 사람은 낙천적으로 태어난다. 유전자나 기후 조건, 그리고 사회 구조가 낙천적으로 되도록 구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변하는 기후 속에서 늘 외세의 압박을 받고 눈치 보며 살아왔으므로, 사회 구조 형성 자체가 낙천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스스로 낙관적으로 될 수밖에는 없다. 아프리카 등 열대 지방 사람 중 낙천적인 사람이 많다. 그들은 유전자가 이미 그리되어 있으므로 생각하고 노력할 필요가 거의 없이 그대로 낙천적이다. 낙관(樂觀)이란, "사물을 좋은 쪽으로 밝고 희망 있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는..
뛰지도 못하면서 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몸에서 氣를 일으킬 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현빈일규(玄牝一竅)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1층은 짓지 않은 채 3층부터 올리려는 사람들입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어찌 어미 노릇을 하겠습니까? 외단(外丹)이 유명무실한데, 어찌 내단(內丹)이 힘을 쓰겠습니까? 약(藥)으로 대신하는 外丹은 임시적 外丹입니다. 이 몸으로 외부의 氣를 거두어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外丹입니다. 仙道는 글이나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하는 몸, 숨, 맘으로 땀 흘려 하는 것입니다. 기초적 몸 다스림이나 단전(丹田), 태식(胎息)도 모르는 사람에게 양신(養神), 채약(採藥), 탈태(脫胎)를 말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음이 무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갈 때, 최소한 그 물건이 무엇이며 용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막연하게 맛있는 것, 근사한 것, 황홀한 것이란 생각만으로는 그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바구니에 담지 못한다. 그것이 10년을 숨을 지켜보고도... 20년을 만트라(mantra)를 외우고도... 평생을 스승을 모시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경계(境界), 즉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풍경(風景)이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알아채는 그놈, 그리고 그놈이 활동하는 무대 위에 함께 서는 것이다. 영리한 개는 발소리만 듣고도 주인을 알아보고, 인연 있는 사람은 죽비 소리나 풍경 소리, 그리고 교회 종소리 한번에도 그 자리를 알아차린다...
양신(陽神)이란, 몸(腦)을 벗어난 의식체(意識體)를 말한다. 그것은 몸 대신 에너지에 기반하여 존재(存在)한다. 그래서 그것을 에너지체라고도 한다. 몸이 있는 동안엔 뇌(腦)가 필요하지만, 몸이 없어지면 식(識)이 주인이 된다. 그것은 에너지와 협력해 만물을 알아채고 창조해 내는 기능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仙道 수련의 요지(要旨)는 살아있는 동안 다른 차원의 뇌(腦)를 만들어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태식(胎息)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일명 '복뇌(腹腦)'라고도 한다. 그것은 에너지(氣)의 뒷받침에 의해 가능해진다. 에너지는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software)는 하드웨어(hardware)가 있어야 구현(具現: realization)되며 하드웨어는 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