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신비주의(神祕主義)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교(宗敎)라 부르지만, 그것은 신앙(信仰)에도 못 미치는 미신(迷信)이다. 신비주의란, 신(神)이나 절대자 등 궁극적 실재(實在)라고 스스로 믿는 것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철학 또는 사상(思想)을 말한다. 우선 말하건대, 깨달음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외부(外部)의 어떤 것과도 합일하지 않으며, 여기서 실재(實在)란 자성(自性) 자체이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숨 쉬는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외부(外部)의 어떤 힘을 숭상(崇尙)하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기운(氣運)을 받거나 그것과 합일(合一)되기를 바..
선정(禪定)에 들어 있을 때는 '참나(眞如)'에 주도권이 있지만, 눈을 뜨면 다시 에고(ego)에 주도권을 뺏겨 괴롭다는 고백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석가모니도 동일하게 느꼈던 일이며, 그래서 석가모니는 선정(禪定)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는 제의를 뒤로 하고 홀로 히말라야로 들어갔습니다. 괴롭다는 사람에게 스승은 그 해결책으로 내려놓음과 내맡김을 처방했다는데, 내려놓음과 내맡김은 수행자의 기본이 아니던가요? 석가모니가 내려놓음과 내맡김을 몰라서 설산(雪山)에서 육 년이나 보냈겠습니까? "참나"와 "에고"는 하나입니다. 영어사전에서 에고를 찾으면 자아(自我)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고(ego)는 죽지 않습니다. 숨과 에너지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보는 "나", 보이는 대상, 그리고 보는 행위가 하나로 느껴진다면 깨달음이 깊어진 것이다. 보는 "나"가 없이는 대상과 행위가 무의미할 것이고, 보는 행위가 없다면 보는 "나"나 대상이 실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고 듣는 "나"와 대상은 둘이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깨닫고 나면 상대의 좋은 면, 아름다운 면만 보이는 법이다. 세상은 감사할 일투성이다. 그것이 내가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세상 모두는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 코 하나만 빠지면 그물 전체가 쓸모없어지듯, 보고 듣고 느끼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화막(screen)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영상을 따라 울고 웃을 뿐입니다. 영사기가 멈추면 비로소 스크린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잠시 전에 비가 오고 화산도 폭팔했지만, 스크린에는 흠집 하나 없습니다. 순수의식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빈 스크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본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빛을 비추면 화면에 온갖 것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그 소중한 것을 지나치고 삽니다. 의식하는 놈은 의식(意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온통 돈과 편안함에만 있으면 은연 중 자기가 서서히 지워져가는 우울함이 있습니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사 가운데서 자기가 자성(自性)에 얼마나..
그 자리는 모양과 소리가 없습니다. 그 자리는 먼 데 있지 않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함께 있습니다. 그 자리(本來面目)는 생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나타납니다. 공(空)과 적(寂), 묘유(妙有)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고 12처(處)의 작용(作用)에만 초점을 맞춰보십시오. 유혐간택(唯嫌揀擇)이면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했습니다. 그 자리를 깨치고 나서는 그 作用의 뒤에 흐르는 에너지를 살피십시오. 작용은 협업(collaboration)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 합니다. 그것이 성명쌍수(性命雙修)입니다.
자기 깨달음은 없이, 죽은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붓다는 분명히 경전(經典)이라 할지라도 믿지 말라 했는데 말입니다. 경전은 그들이 죽은 후 남긴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대개 죽은 이의 이야기는 각색이 됩니다. 마치 자기가 쓰는 자서전처럼 말입니다. 죽은 이의 이야기는 대개 그의 추종자였던 사람이 만들어냅니다. 가급적 그의 취약한 모습은 축소되고, 그의 위대성이 강조되며 전래하는 훌륭한 이야기들을 끌어옵니다. 죽은 사람 이야기는 뻥튀기가 많습니다. 아무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는 저속한 차력사나 마술사, 잔재주꾼이 대도인(大道人)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기한이 지나버린 수표는 버리세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문제를 상담하세요. 그가 비록 영화 속 ..
우리는 기(氣)가 가득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느끼려고만 한다면 누구라도 氣를 느낄 수 있다. 생명 자체가 氣이기 때문이다. 나름 氣 전문가로 알려져서 가끔 氣의 강도를 감별해 달하는 요청을 받는다. 대개는 자기 상품에서 氣가 많이 나온다고 증언(證言)해달라는 요구다. 나는 보통 "많은 氣를 머금고 있군요. 하지만 식물이든 광물이든 氣를 머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LA에 머물고 있을 때 초청을 받아 애리조나의 세도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氣가 특별히 강하다고 소문난 곳이다. 하루를 있어 본 결과 다른 곳에 비해서 색다른 기감(氣感)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특별하게 좋다는 점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초청자들은 물론 실망했겠지만.... 氣感이 강하기로 말하자면 ..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어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인도로 천당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빛이 비치는 긴 통로를 따라갔었다고도 하고 텅 빈 빛 속에 머물렀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숨이 끊긴 후에도 어느 정도는 뇌(腦) 활동이 진행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무아(無我)를 주장하면서도 사후세계를 체험하는 그놈은 과연 누구일까요? 나 역시 세 번을 죽어(?) 봤습니다. 한번은 장티푸스로 사경(死境)을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한 달을 먹지 못하고 피똥만 연일 싸서 기진맥진할 때였습니다.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한 그날 밤이었습니다. 내가 저절로 천장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피골(皮骨)만 남아 누워있는 침대 앞에 어머니가 엎으려 울고 있었고, 돌아서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며..
선도(仙道)를 닦아 사람들과 함께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을 연구 발전시키는 사람을 '인선(人仙)'이라 한다. 그는 은둔하지 않으며,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버리지 않는다. 그의 삶은 부러울 정도로 풍부하다. 仙道 기초 공법만 습득하고 단전(丹田) 자리만 확보했다면,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며 산다면, 그를 '人仙'이라 부를 만하다. '지선(地仙)'이란, 소주천(小周天)과 양신(養神)을 통해 환지본처(還至本處)를 이룬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재물과 권세에 집착을 갖지 않고 살며, 기회가 있는 대로 절대계를 드나들기도 하는 사람이다. 다른 말로 그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르며, 보시(布施)를 생활화하며 산다. '천선(天仙)'이란, 세상을 벗어나 지상 세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사..
불교(佛敎)의 깨달음은 머리에서 시작해(頓悟) 가슴을 거쳐(解悟) 배로 이동(證悟)하지만, 선도(仙道)는 오직 하단전(下丹田) 중심으로 공부를 간편하게 진행한다. 상중하(上中下) 丹田은 하나로 결합하여 있어서 下丹田을 닦으면 中, 上丹田은 저절로 닦아지기 때문이다. 선도에는 상기병(上氣病)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수행으로 얻어진 상기병도 선도를 닦으면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있다. 몸, 기운, 맘(精氣神) 순으로 차례로 닦기 때문에 우선은 공부속도가 다소 느린 듯해도 기초가 되는 몸의 기운부터 든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리함도 지니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性) 공부 일변도로 되어 있지만, 선도는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기본으로 한다. 성명쌍수란 性(본래 마음)과 命(건강과 사명)을 동시에 닦는다는 뜻으로 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