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누구는 돈으로 산다. 그에겐 돈이 神이다.누군가는 "내가 누구(?)"라는 것으로 산다. 그래서 그 지위(地位)를 잃지 않으려 애를 쓴다. 신앙(信仰)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자식 때문에 사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학벌로 산다. 뭘 좀 안다는거다. K 高를 나오고 S 大를 졸업했다는 것이 그의 존재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TV, 라디오에서 좀 안다는 것 과시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사는 인간도 있다. 옆집 여자는 자기가 K 여고를 응시했던 여자라는 것이 큰 자랑이다. 비록 불합격했지만 말이다. 얼굴과 몸매 지키느라 사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엉덩이에 10억짜리 보험을 든 사람도 있다. 그의 직업은 침대 쿠션감별사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내가 의지하며 살 것이 못 된다..
단지 그 자리를 본 것뿐인데, 세상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물 사물이 모두 아름다운 쪽으로만 보이게 되었고, 별것 아니던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텅 비어있고 고요한 가운데 나와 너, 그리고 모두가 함께 웃는 동화 같은 그 자리가 무슨 조화인지 몰랐다. 조마조마하던 마음, 엄습하는 불안이 사라지고, 시달리며 허덕거리고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게 되었다.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는 밋밋하고 황량한 그 자리를 보았을 뿐인데, 마음이 마치 술에 취한 듯 느슨하게 변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느님을 만난 것도 부처님을 만난 것도 아닌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았을 뿐, 무슨 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데, 세상을 보는 눈은 변해 있었다. 개망초 꽃이 저렇게..
'비구(比丘)가 되어야 견성(見性)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 질문을 한 청년은 견성에 대해 무지(無知)한 사람이다. 견성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런 질문은 애당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지 말라. 見性이란 性品을 보는 것, 즉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품은 比丘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사찰(寺刹), 선방(禪房)에 가야 찾아지는 것 또한 아니다. 성품은 단 1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밥을 먹든 꿈을 꾸든,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래서 석가(釋迦)는, '나와 여러분은 모두 부처임에 틀림없다. 단, 나는 내가 부처라는 걸 알고 있고, 그대들은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연인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인이 출가한 비구를 찾아 "만약 중노릇을..
죽어서 지옥(地獄)에 가지 않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 재산을 교회에 바치면 지옥 갈 것도 천당에 간다고 가르치는 악덕 목사도 있다. 천당과 지옥에 가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만 죽은 후가 늘 걱정된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 혹시 죽은 후 천국 출입이 허가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겠고, 운수가 나빠서 지옥에 간다고 할지라도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화탕지옥(火湯地獄)에 간다고 할지라도 지낼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죽어서 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은 사람은 신경(神經)이 없어지기 때문에 뜨거워도 뜨거운 줄 모르고, 차가워도 차가운 줄 모르고, 언제나 무념무상(無念無想)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공을 들여 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일이 그릇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정체성을 깨우치는 일(見性)이 그런 경우다. 그것은 손대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서 애를 쓰면 오히려 더 간격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名利만 밝히고 自性을 깨우침에 무관심하면, 있었던 인연도 멀리 떠나버린다. 그래서 노력 없는 노력이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애씀을 내려놓을 때 더 유리하다. 없던 것을 새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우침을 얻고 나서부터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命 공부는 세상과도 연결되며 정성으로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無爲가 있으니 有爲가 있으며, 性이 있으니 命..
그것이 없이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모두가 허깨비에 불과하다. 누가 보는가? 눈이 보는가? 망막이 보는가? 누가 듣는가? 귀가 듣는가? 달팽이관이 듣는가?누가 느끼는가? 피부가 느끼는가? 신경이 느끼는가? 그것이 보고 그것이 듣고, 그것이 느끼지 않는가?보이는 것도 지나가고, 들리는 것도 지나가고, 느끼는 것도 지나가지만, 그것만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오롯이 있지 않던가? 그것은 모양도, 들림도, 느낌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일 뿐이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모양을 모양 아닌 줄로 볼 수 있으면, 바로 하느님을 만난다(若見諸相非相即見如來)"
보는 자가 없이 보이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 나 없이 너만 있을 수 없듯이, 너 없이는 나 역시 없다. 주체(主體)가 없이 객체(客體)는 없으며, 객체가 없으면 주체 역시 없다. 주체와 객체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주객(主客)은 하나다. 객의 자리에 주가 들어앉아 있고, 주의 자리에 객이 함께하고 있다. 알아챔과 대상도 원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을 깨우칠 때 더는 알음알이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컴퓨터로 말하면, 하드웨어가 그대로 소프트웨어가 되는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체형 컴퓨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드라마가 된다. 그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반목하고, 폭탄이 터져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더라도...강 건너 불처럼 구경하..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기억에 없는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행 금고에 백 억대의 귀금속과 천억이 내 명의로 들어 있어도 열쇠, 비밀번호나 보관처를 모르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존재는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죽을 수도 없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부활이나 영생을 믿는다고 밤을 새워 소리 질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안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 11:25)"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다" (요한 17:3) 이 성경 구절을 아는가? 그리고 믿는가? 이 소식 앞에 당신이 크리스천이든 불교 신자든 아무..
스트레스의 삶 속에 살면서 가끔은 고요히 앉아 기도와 명상에 잠기는 것은 건강에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도 세상도 피해서 골방에 들어가 그 짓만 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체험이 있었든, 아니든 간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선정(禪定), 즉 "사마디(samadhi)"에만 마음이 묶여 있다면 이른바 방석 중독이다. 각설하고... 그들이 숭상하는 싯다르타는 사마디의 극점(極點)까지 이르고는, 그것으로 부족하여 고행(苦行)에 들어갔고, 나중엔 그것마저 아니란 결론에 이르러 목욕과 우유 죽의 편안함을 택했다고 전해온다. 禪定이란 자기 자신에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일하든, 길을 걷든, 앉았든, 누웠든,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를 보는데 무슨 별도의 의식이 필요하단..
仙道가 外道들과 구별되는 것은 性命双修란 특별함에 있다. 性이란 自己, 즉 사람이 지닌 性品(本來面目)을 가리키며, 그것이 파악(見)된 것을 見性이라 한다. 하지만 無上한 깨우침을 원한다면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見性을 이루고 나면 마땅히 得命에 매진(性命双修)해야 한다. 견성만 있고, 득명이 없는 것은 절름발이 깨우침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自覺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神의 조작품(造作品)"이라 하거나, "나라는 존재는 없다(無我)"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은 命을 모르는 無知의 소치이다. 命이란 목숨, 즉 생명력(生命力)이다. 그것은 숨보다도 먼저고, 알아차림(靈知)보다도 상위(上位)인 그것들 모두를 있게 한 원인자(原因子)이다. 우리는 가고 또 가야 한다. 見性(無爲法)이 있고나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