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하늘의 은총이 유별난 사람이 아니고는, 자기가 누군지 담박 깨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 엄청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내가 어쩌랴! 길을 모르는 자는 쪽팔려도 길을 안다는 사람으로부터 안내를 받는 법, 우리는 깨우쳤다는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 밖에 별 수가 없는데, 그 안내라는 것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은어(隱語)이기 때문에 복장만 터질 뿐이다. 그것을 위해 처자식 세상 모두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나봐도, 그것 역시 로또에 비길만큼 당첨율이 낮다. 아니 로또보다 더 어렵다 해야 맞을지 모른다. 바야흐로 21세기 정보화(깨달음) 시대를 맞아 하늘(?)의 뜻을 따라 쉬운 현대의 우리 언어로 깨달음에 이르는 기법(skill)을 말..
일률적으로 말하지 말자. 그리하면 오류가 생기기 십상이니... 지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려내려 하는 사람도 있듯이 번뇌(煩惱) 역시 그것을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즐기는 사람도 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번뇌가 곧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번뇌가 곧 나이며, 번뇌를 버리고는 누구라도 살아 남을 수 없다고 믿는다. 번뇌가 단지 괴로움 만이 아니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대로 두라. 남으로부터 받은 잣대를 가지고 그들을 재단하려 하지 말라. 그가 맞고 당신이 틀릴지 누가 알 수 있는가? 佛道가 지우는 것이라면 仙道는 살려내는 것이다. 어느 한쪽을 옳다고 말하지 말라. 혹시 세상 모두가 괴로움(一切皆苦) 뿐이라고 믿고 있다면 흔적을 남기지 말고 조용히 여기서 떠나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주의 이치이다. 그러나 A라는 원인이 있으면 A'라는 결과가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꼭 A'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신통력도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또한 말로는 깨달음 운운하지만 수행의 목표가 신통력인 인사들도 많다고 본다. 그들이 틀렸다고 할 생각은 없다. 물론 깨달음을 얻으면 신통력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신통력이라는 등식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견성을 한 사람들로부터 "실망했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견성을 하면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고, 하다못해 투시력이나 염력이라도 얻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25에 있는 예수의 말이다. 그런데...세상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부활한 사람이나 영생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왜 그런가? 잘못 믿은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그것에 대해 예수는, "영생(永生)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한 17:3)"라고 답한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예수를 알기 위해선 어찌해야 하는가? 예수는 비유로 답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가 10:25)"고 말이다. 당시 유대에는 "바늘귀"라는 성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입구가 너무 좁아 사람..
믿음이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믿음에 대해 얼마나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聖書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히브리서 11:1)"라 정의했다. 참으로 난해한 말이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과연 이해를 했는지 의심스럽다. 저자 역시 바울, 바나바, 아볼로, 누가 등등 추정만 할 뿐 모호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Hope)이고, 보지 못하는 것(Not seen)이라 했다. 바라는 것이 실상이 있는가? 보지 못하는 것으로 증거를 삼을 수 있는가? 믿음은 실체가 아니라,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마음 작용이다. 누가 Substance(물질)를 실상(實像)이라 번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증거(Evid..
인간은 존재감(存在感)으로 산다. 누구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아이나 노인이나 마찬가지다. 가급적 좋은 존재감이면 더욱 좋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부정적인 존재감이라도 상관없다. 단지 존재감이 필요한 것이다. 존재감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울어대는 아이나, 사랑을 구하는 젊은이나, 손자가 보고싶은 노인이나 모두가 절실한 존재감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려 하고, 무언가를 가지려 하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일...그것이 안되면 타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요즘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난사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존재감과 연관이 있다. 남에게 인정을 받을 때나,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해지는 것도 존재감 때문이며, 사업의 실패, 명예의 상실, 소외감, 자책감, 우울증 등으로..
성서는 예수가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해 형주(刑柱)에 달렸다고 전한다. 이해가 안될지 몰라도 그것으로 우리를 묶고 있던 연좌제(緣坐制)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그래서 그를 구세주(救世主)라 하는 것이다. 아담이 지은 죄(善惡果)로 인해 그의 후손 모두는 죄인이라고 기독교는 가르친다. 그것(原罪)은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으며, 예수 역시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의 세상에 온 소명은 대속(代贖)이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을 神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싶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善惡을 넘어선) 사람이었다. 죄는 자성이 없으며,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罪無自性從心起)임을 께우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속 이후 인간들은 죄에서 벗어났으며 영생의 길이 열렸다고 ..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각각 분야별로 많은 방법론이 있었지만, 압권은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가 아닌가 생각한다. "병 속의 새 꺼내기"란 이야기가 있다. 아기새를 병속에 넣고 키웠는데 새가 자라서 병밖으로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를 병을 깨지 않고 새도 다치지 않게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불가의 화두(話頭)이다. 내려 놓아라. 살불살조(殺佛殺祖)하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죽인단 말인가? 이 마음을 빼고 내려 놓을 것은 어디에 있으며, 죽여야 할 부처나 조사(祖師)는 어디가서 찾는단 말인가? 냉장고도 없고, 코끼리도 없으며, 병도 없고, 새도 없다. 깨달아야 할 것은 더더구나 없다. 그냥 이것일 뿐, 애를 쓸 필요는 어..
우리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기독(基督)의 가르침은 그것을 원죄(原罪)라 하고, 불교(佛敎) 역시 그것 (分別心)에서 벗어남(涅槃)이 최상이라 생각하지만 역시 바로 지금도 나누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佛道와 仙道는 하나다. 佛者는 공(空)을 이야기하고, 仙人은 허(虛)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의 중심 가르침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생각한다. 그 두 마디 역시 둘이 아니다. '선불합종(仙佛合宗)'이란 말이 있다. 불과 선이 같은 가르침이란 뜻이다. 언뜻 생각에 불자는 색즉시공을 말하고, 선인은 공즉시..
깨달음을 회복했다 할지라도 단번에 世間을 떠나 出世間에 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이 비록 無常하고, 또 꿈같은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세간의 감각적 재미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백장야호(百丈野狐) 이야기가 있다. 전생에 나름 한소식을 한 도인(道人)이 하루는 백장을 찾아와, "대수행인(大修行人)은 인과(因果)에 떨어지지 않느냐"는 학인(學人)의 질문에 "그렇다(不落)"라고 잘못 대답하여, 500생 여우몸을 받았다며 백장에게 해결을 의뢰했고, 그것에 "어둡지 않다(不昧)"는 답으로 간단히 해결을 해 주었다는 무문관(無門關)의 글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내면에 진보의 마음이 없다면 삶에 무슨 재미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