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5)
谷神不死
깨달은 이에게는 고통(苦)이 없다. 그는 진실(眞實)이 아닌 것들에 관해선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진리(眞理)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나와 남, 나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에고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생각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사라진다. 진아(眞我)는 오온(五蘊)에 속하지 않으며 그에게는 자타(自他)가 없다. 그는 그와 세상을 나누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갈등도 없다. 우리의 고통은 분별심 때문이며, 에고가 만드는 비교하는 마음, 호불호(好不好)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에고가 허깨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에고는 연기(緣起)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이라는 말입니다. 잘 못 들으면 아주 불경(不敬)스러운 말입니다. 그 말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말과도 통합니다. '항상 새롭게 마음을 써라'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신조를 세우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조(信條)만을 위한 신조라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습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태양 역시 공전(公轉)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자리에 두 번 있을 수 없습니다. 道 닦는 法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이라 해서 바른 道라 할 수는 없습니다. 經典 역시 경전일 뿐입..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내가 좋아하리라 생각되는 것들을 자주 사서 선물했다. 하지만 아내는 늘 시큰둥해했고, 더러는 이런 건 무엇 하러 사 오느냐고 불평했다. 그것으로 인해 자주 다투었고, 결국은 파경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그가 아내에 대한 관심을 줄였거나 흡족하지는 않아도 아내가 원하는 것만을 사다 주었다면 상황이 어떠했을까? 다소 냉정한 듯 보여도 상대가 요구하지 않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주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장 눈앞의 재물이나 권력이 더 중요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함부로 '깨어나라'라거나 '깨달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 많은 선각자가 그것을 참지 못해 젊어서 목숨을 잃었다. 道를 구하는 사람 찾기는 가물에 콩 나기보다 어렵다. 혹시 귀 ..
사람들이 돈과 權力에만 관심이 있는듯해도 평생을 道를 닦으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산속마다, 사찰마다, 수도원마다, 道 닦는 이들이 넘쳐나고, 길을 나서면 仙院에, 시민禪房이 그리도 많고... 그것 얻기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말들은 하는데 왜 見性한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가? 혹시 그들이 관심사가 다른 데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금할 수 없다. 10년을 살은 동네 어귀 코너에 약국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었고, 아내가 첫애를 임신하고 보니 길에 배부른 여자가 어찌 그리도 많았던지... 지금 나의 관심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깨달음 얻기를 원하는가? 혹시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신에게 질문해 볼 일이다. 관심사가 ..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을 때나 心琴을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 진정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받거나 知的인 충족감이 올 때, 우리는 기쁨에 잠긴다. 그러나 불쾌한 것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면 그것은 고통이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피하려 한다. 삶이 前者로 채워지면 행복이요, 後者가 많아지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오래 인내하다 보면 언젠가는 붓다의 말대로 해탈(解脫)을 얻거나, 예수의 말대로 천국에 갈 것이란 기대를 하고 산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극락이나 천국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젠가"라는 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이란 우리의 생각이 만든 가공의 것임을 이해하라. 해탈과 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그대로 그대와 함께 있다. 그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당신은 바로 대자유..
깨달음이란 자기가 가진 알음알이, 즉 옳은 것과 그른 것, 모두를 내려놓은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느님은 생명의 비밀을 한군데에만 숨겨 놓지 않았다. 눈 뜬 사람은 Bible과 코란, 베다와 佛經 속에서, 그리고 노장(老莊)과 새소리, 시냇물 소리 속에서 진리를 본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눈이 뜨인다. 한발 물러나야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그것을 신앙하며 편 갈라 반목했던 일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아채게 된다.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탓할 순 없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은 의식(意識)의 영역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을 아는 그것은 단순한 의식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을 가리켜 현자(賢者)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4대 聖人이 된 이유는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리려 애썼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이 일어난다. 1. 많은 사람이 믿거나 따르는 오래된 것을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고 생각 없이 믿기 시작한다. 2. 겸손한 마음으로 탐구(探究)를 시작한다.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3. 혹시 그것을 알고 있는 놈이 있으면 자존심이 상해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 4. 괴변(怪變)이라고 비난하고, 결국은 그를 죽일..
깨달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하고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몇 번쯤은 죽었다 깨어나야(輪廻)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리 말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깨달음의 환상 속에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천사들이 모두 내려와 경배하는 일, 갑자기 천리안 타심통 능력이 생겨난 것을 깨달았다고 믿고 있다. 단언컨대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단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본래면목(性)을 본다(見)는 뜻으로 견성(見性)이라고도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영원히 변치 않으며, 萬事를 일어나고 꺼지게 하는 妙한 것이 있다. 그것을 깨우친 것을 見性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위해 다음 생이 필요하진 않다..
눈을 뜨고 보니 길이란 길은 모두 고향 가는 길이요, 보이고 들리는 건 하나같이 어머니 품속이더라 그냥 눈을 뜨면 됩니다. 쓸데없는 생각만 밀어내면 지금 눈앞이 바로 찾아 헤매던 깨우침입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았습니다. 바로 지금 이 길이 고향 가는 길인데 말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나요? 그 길 천국(Kingdom)으로 가는 길 맞습니다. 지금 만트라(mantra)를 외우고 있나요? Moksha(해탈)로 바로 가는 길입니다. 매일 聖靈체험을 합니까? 훌륭합니다. 丹田調息, 小周天, 太極拳, 탄트라, 쿤달리니...알고보니 모두 모두 아주 훌륭한 道通法 맞습니다. "이 뭐고", "뜰 앞 잣나무", "無字", "삼서근", "東山水上行" 등등 1700 公案 모두 그대로 열반(涅槃)이고, 一點面壁 ..
깨닫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말로는 깨달음 운운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고 있으면 가속페달를 아무리 밟는다고 해도 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재산이 자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 권력이 더 먼저인 사람, 평판이 두려운 사람, 깨달음보다 그런 것들이 더 우선인 사람에게 깨달음은 오지 못한다. 차라리 가까운 그쪽을 택해 그쪽으로 전심전력하라 엉거주춤하지 말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어서는 무엇 하나 올바로 이룰 수 없다. 오직 현재만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과거에 끄달리지 말고 미래에 기대지 말라. 그런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는 이미 사라졌고, 내일은 오지 않는다. 과거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