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너무 가까워도 볼 수 없고, 너무 멀어도 볼 수 없다. 너무 쉬운 문제는 쉬워서 틀리고, 너무 어려운 문제는 어려워서 틀린다. 부분만 알고 전체를 모르는 사람을 소인배(小人輩)라고 하지만, 늘 전체만 이야기하고 부분을 소홀히 해서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과의 이야기는 길지 않다. 5분도 충분하다. 그런 사람을 신앙인(信仰人)이라 부른다. 자기가 무신론자(無神論者)라고 항변을 해도 소용없다. 그는 무신론을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만 있으면 모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에너지(氣)가 없거나 약하면 에너지 소통에 큰 장애가 생기는데 과연 깨달음인들 유지가 가능할까? 생사(生死)가 일여(一如)라고요? 평생을 간화선(看話禪)에 취해서 심지어 조..

허상(虛像)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신(鬼神)이나 망자(亡者)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가상(假像)의 신적(神的) 존재나 우주인들과 대화를 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개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Fact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Fact란 지어낸 것이 아닌 입증(立證)이 가능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는 있을지언정 신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누군지를 깨우치는 것(見性)' 입니다. 깨우치고 나면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고 세상 구경을 하며 살게 됩니다. 귀신이 나타나든, 神이라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든, 혹 UFO가 우리 집 마당에 내려도, 그저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원초아(原初我)와 에고(ego), 그리고 자성(自性)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자성만을 실재(實在)라고 가르칩니다. 원초아와 에고는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원초아는 본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이기적 성향을 띄는 에고, 즉 자아(the Self)라고도 불리는 것이 행위의 주체이고, 대상과 구별되는 의식의 통일체입니다. 원초아는 존재의 근본을 유지하는 소아적(小兒的)인 욕망의 세계이며, 교육의 영향으로 그것을 감독 조절하는 의식이 자아(自我), 즉 에고입니다. 또한 따로 분류하기도 하는 초자아(超自我)라 불리는 에고를 감시하는 의식이 있으나, 나는 그것도 자아의 영역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견성(見性)을 위해서는 에고(the Self)를 바로 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

신(神)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神보다 더 사랑하고, 안식(安息)할 줄 모르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살인을 성(聖)스럽다며 축복하고, 늘 남의 여인에게 관심이 있고, 심지어 남의 나라까지 쳐들어가 도둑질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신자(信者)라고 하면서도 늘 이웃의 것을 탐낸다. 神이 죽지 않았다면, 대륙을 발견했다고 속이고,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원주민을 학살할 수 없고, 사람을 노예로 삼지도 못하고, 흑인이라고 목 졸라 죽이지도 못한다. 괜스레 남의 나라에 원자탄을 터트리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를 분단시킬 수도 없으며, 주둔비를 다섯 배나 요구할 수는 더더구나 없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신(神)..

진리(眞理)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信仰)일 뿐, 종교(宗敎)라 이름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神)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은 유일신(唯一神)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마음속에 만들어진 우상은 어찌할 것이며, 십자가와 뾰족탑, 그리고 돌이나 쇠로 만든 사람 모양은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살인(殺人)하지 말라고 해놓고, 옆 나라 사람은 죽여도 된다는 논리는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정해놓고, 처를 여럿을 둔 사람들(아브라함, 야곱, 다윗, 놋, 솔로몬)에게 신(神)이 축복을 내리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혼인하지 말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면, 어찌하여 사제나 ..

견성(見性)을 하셨다는 분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見)?” 누구는 꽃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고, 누구는 광활(廣闊)한 우주(宇宙)를 보았으며, 또 어떤 이는 기차에 앉아있는 자기 뒤통수를 보았다고도 했다. 진정 그런 것이 자기였단 말인가? 자기의 성품(性品)이 그런 식으로 생겼단 말인가? 과거에 어떤 이는 “똥 막대기”라 했고, 어떤 이는 “뜰 앞에 잣나무”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東山水上行 ”이라고도 했다는데, 과연 그것이 깨달음의 모양을 가리킨 걸까? 그것을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으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했는데,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유능한 의사는 병을 물어보지 않고, 그 사람의 몸짓, 목소리, 그리고 안색을 살피고는 바로 처방전을 내놓는다. 병명(病名)은 그저 이름일 뿐..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 어디선가 읽었던 이야기다. 2년 너머를 배우고도 답답하기 짝이 없던 Y가 이제는 내 이야기를 좀 알아듣는 듯하여 너무나 흐뭇하다. “선생님 못 만났으면 어땠을지 몰라요. 지질 때는 확실하게 지져줘야지, 아니면 다시 유야무야가 되고 맙니다.”라고 했다. 그는 전혀 맹탕으로 나에게 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만 만나면 ‘깨달음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이다’라고 늘 말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부가 들쭉날쭉하고, 혼자 앉았을 땐 자신의 밝음을 의심했다. 공부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쉬운 것이 깨달음’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말이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이쪽으로만 오면 왜 그리도 이해력이 떨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 이해가 된다고 했고 ..

개를 1년 길렀는데 명령에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따른다면 그 녀석을 믿을 수 있다. 친구를 사귀었는데 30년이 되도록 우정이 변치 않았다면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수행자(修行者)는 의심덩어리이다. 오죽하면 대의단(大疑團)이란 말이 나왔겠는가? 수련의 결과가 처음엔 믿어지지는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우연히 그리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우연(偶然)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기정사실로 생각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어느 쪽에서 보아도 틀림이 없고, 그것이 실생활에 그대로 나타난다면 깨달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것을 확철대오(廓徹大悟)라고 한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다음 인터체인지까지는 옆 길로 나갈 수가 없다. 수행(修行)도 역시 한번 들어서면 의심이 ..

세상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전혀 결을 달리하는 것들이 있다. 불도(佛道)는 삼법인(三法印)이 그 중심에 있으며,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그것을 선도(仙道)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란 뜻이다. 仙道는 그 말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급적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좋게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仙道는 "나"라고 하는 실체를 인정한다. 그것을 가꾸어 아름답게 하는 것이 공부의 주제가 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인생은 고통뿐이다"라는 佛道의 주장에 仙道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생엔 고(苦)와 락(樂)이 번갈아 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산다. 분명히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상근기(上根器)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다. 한 생각이 상근기를 만든다. 상근기란 무엇보다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의 돈과 권력에 만족하지 못한다. 세상의 화려함 모두가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산으로 가거나 불문(佛門)에 들어간다. 중근기(中根器)는 양다리다. 老子는 그들을 가리켜 반신반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세상에도 있었다가, 출세간(出世間)에도 있었다가,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마음을 51%만 깨달음에 두고 산다면 세상을 버리지 않고도 조만간 상근기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 51%란 사실상 종일 깨달음 생각만 하는 것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