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단편적인 믿음에 빠져있지 않음이 깨어있음이다. 허깨비, 즉 변하고 있는 것에 속지 않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정치, 경제, 사회에 전혀 무심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에 휩쓸리지는 않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코로나-19를 포함하여 외부로부터 오는 어떠한 것에도 두려움이 없이 그것에 대처할 힘을 기르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언제나 자성(自性)에 대해 무지하지 않은 것이 깨어있음이며, 에너지(氣)가 없으면 그 무엇도 실존(實存)하기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다. 성경(the Holy Bible)은 말한다. "깨어있으라.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所重)한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가족인가? 이념인가? 신앙인가? 부처님인가? 하느님인가? 아니면 강아지인가? 고양이인가? 내가 없이는 아무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은 돈을, 권세를, 가족을, 이념을, 신앙을, 부처님을, 하느님을, 개를, 고양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알아보려고도 안 하지 않습니까? 잘못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없이는 그 무엇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어서 깨어나십시오.

山 안개를 보고 아련함을 느낀다면, 순간 당신은 깨어 있다. 멀리 뻐꾸기 우는 소리를 가슴으로 듣고 있다면, 순간 당신은 깨어 있다. 강아지를 만지면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난다면, 순간 당신은 깨어 있다. 밥상이 들어왔는데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다면, 당신은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다. 술, 담배, 약을 과용한다면 당신은 깨어있지 않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숟갈질만 하고, 배우자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을 모르고 지낸다면, 당신은 깨어있지 않다. 누구로부터 듣거나 책을 읽고서 생각도 없이 그것을 따라 믿고 있다면 당신은 깨어있지 않다. 혹은, 누구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고, 그것에 대해 살펴보지도 않은 채 시비부터 걸려 한다면, 당신은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다. 같은 실수를 세 번 이상 하면서 아무렇지도 ..

일단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것(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아(the Self)가 나인가? 나와 가깝긴 하지만, 그것 역시 나는 아니다. 자아의 다른 이름은 에고(ego; 我相)이며,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에고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것(알아챔)이 나란 말인가? 그것도 엄밀히 "나"는 아니다. 그것을 한자어로 식(識), 혹은 영지(靈知)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도 에고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란 말인가.?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言語道斷) 없고, 문자화할 수(不立文字) 없다. "오직 모를 뿐(虛)"인 에너지(氣) 덩어리, 알아챔(識)에 의해서만 오직 알아차려지..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선(善)과 악(惡)을 가지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것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처럼 선함을 따지는 동물도 없으며, 사람처럼 사악한 존재도 없다. 즉,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역사상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한다는 성경(the Holy Bible)을 예로 든다면, 그 책은 "善惡을 아는 것"을 원죄(原罪)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우리도 죽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善도 모르고, 惡도 모르면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함부로 좁은 소견으로 "내 것은 善이고, 네 것은 惡이다"라고 독선적 규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지금도 그러니 말이다. 성경은 야훼(유대의 神) 만..

의식(意識) 있는 것을 알아차림이라 합니다. 그냥 멀거니 살아서야 쓰겠습니까? 하다못해 멀거니 살고 있다는 것이라도 알아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독되어 사는 삶을 의식 없는 삶이라 합니다. 담배, 술, 약, 섹스, 돈, 명예에 대한 중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빠져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음식 맛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미장원에 다녀온 것을 알아차리고, 앞산이 연두색으로 아름답게 변하는 것 정도는 알아차리며 살으시라는 겁니다. 알아차리는 놈을 알아차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소리쳐 불러도 대답하지 못합니..

개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적으로 자유이다. 그것은 국가라 할지라도 금지할 수 없고,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더더구나 없다. "진정성이 있다", "진심이다", "그렇게 배워 그렇게 믿고 있다"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전혀 개인적일뿐,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 붓다가 "경전(經典)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은 믿지 말라"한 것은 우리에게 주는 자비의 표현이다. 생각에 속아 배운 것을 의심해 보지 않는 한, 거기엔 진실은 없다. 목숨을 바쳐 신앙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과 믿음을 내려놓고, 텅 빈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실(實在)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아이를 맡을 때 어느 정도 기초가 있어 80점 이상 점수가 되는 학생을 좋아하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바닥 점수의 아이를 더 선호하는 선생도 있다. 경험에 의하면 뒤의 아이가 백 번 가르치기가 수월하다. 물론 당사자가 성적을 올리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앞의 아이 같은 학생은 맡지 않는다는 선생도 있다. 습관이 잘못 들어있어 그것 조정하느라 두 배의 노력이 들기 때문이란다. 선도(仙道) 수행도 마찬가지다. 발심(發心)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용어도 잘 모르는 쌩짜배기가 오히려 진도가 빠르다. 그런 사람은 의심 없이 마치 스펀지처럼 가르침을 100% 받아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다. 나는 두 가지 조건만 있으면 성..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는 놈이 있습니다. 앉고 싶고 눕고 싶은 마음, 내 맘속에만 있는 비밀을 먼저 아는 놈이 있습니다. 그놈은 스스로 "모른다는 것도 아는" 영민성이 있습니다. 그놈을 알아채기는 어렵습니다. 그놈은 있는 듯 없는 듯, 신비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놈은 몸도 아니고 마음(ego)도 아닙니다. 그놈은 생각보다 먼저이므로, 당연히 존재의 느낌이 그놈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를 주장하는 불교도나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철학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물건입니다. 그놈에 대해서 말이나 글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 그놈을 만난 사람은 아주 희귀합니다. 그놈의 정체는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지만, 그놈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놈이 ..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그 친구, 견처(見處)는 얻었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자(漢字) 세대가 아닌 경우 생소하시기도 하겠습니다만 말입니다. 도대체 見處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초행길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찾았을 때, 다시 길을 잃어 헤매지 않도록 머릿속에 눈에 잘 띄는 랜드마크(landmark) 같은 것을 두어 개 설정해 놓는 것이 다음을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하여 익숙해지게 되면 더 이상 랜드마크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겠지요? 나중엔 그곳의 여타 구조물, 도로, 그리고 골목 하나하나가 모두 랜드마크가 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깜깜해지는 것이 보통이며, 그 자리를 다시 끌어내는 것이 막막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 상태를 다시 가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