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채고(見聞覺知), 그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그것으로 인해 그 자리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리에 머물 수만 있었다면 초견(初見)이다. 그것을 통해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를 벗어나 오롯한 체험을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경전(經典)이나 가르침, 교리(敎理)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것들을 모두 떠나 그 자리 속에 들어앉은 것, 그것을 가리켜 견처(見處)를 얻었다고 한다. 비록 그 자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유지가 어려울 수는 있다. 첫째,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느냐이며, 둘째, 얼마나 절실했느냐로 판가름 난다. 체험하고 나서는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펼쳐내야 한다. 스승에게 반복해 묻고, 도반(道伴)들과 기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아울러 경전(經典)을 살..

선지식(善知識)들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어록(語錄)이나 경전(經典)들을 읽고, "아! 이것이 깨달음이구나"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스크림 맛을 본 사람으로부터 "아이스크림은 달고 시원하다"라는 말만 듣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善知識들이 "깨닫기 전에는 책을 보지 말라"고 한 이유입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만, 운(運)이 나쁘면 영원한 착각 속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위해서는 어떠한 체험(體驗)이든 필히 체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체험보다는 은은하게 이어지는, 그것이 에너지를 만나면 선명도(鮮明度)가 더 확실해지는 그런 체험이 좋습니다. 너무 강한 것은 쉽게 스러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善知識들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

"현대 사람들은 근기(根器)가 약하여 방하착(放下着)을 할 수가 없고, 따라서 깨닫기도 어렵다"고 말하는 불교 경전 연구가가 있습니다. 어떤 학부모가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집중력이 없어서 공부를 잘하지 못합니다. 집중력 기르는 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게임을 할 때도 집중력이 없던가요?" "아니요.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도 못 듣습니다." 나는 "집중력이 있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집중력을 쏟는 법이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는 집중하기 힘듭니다. 깨닫기를 원한다면 "나는 진정 깨닫기를 원하는가?"라고 자기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깨닫는 것보다 돈이나 권력, 혹은 학문을 더 좋아한다면 그쪽으로 성공해야..

인간은 욕망과 의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예술, 학문, 종교가 있다. 욕망과 의지, 이성은 마음 작용인데, 이성이 의지 욕망의 위에 자리한다. 이성(理性)이 최고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종교(宗敎)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 '신앙'이 아니다. '신앙(信仰)'을 가리켜 최고의 가르침인 '종교(宗敎)'라고 칭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다분히 욕망적(慾望的)이며, 그리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독이다. 인간은 욕망(慾望)의 동물이다. 그리고 의지(意志)의 든든함에 따라 욕망의 성취도가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의지의 감독역으로 理性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얼마나 그것을 발현시키며 사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이다.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느냐로 그 사람의 격(格)이 가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명 모든 이치와 논리를 내려놓는 것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돈오(頓悟) 체험 이후에는 해오(解悟)가 꼭 필요하다. 깨달았다는 사람이 이치를 모르고 횡설수설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천 권의 경전(經典)보다 頓悟가 우선이다. 알음알이는 있으나, 돈오가 없는 것은 마치 그림 속 진수성찬(珍羞盛饌)과 같다. 아무리 잘 그려진 그림이라 할지라도, 그림을 먹어서 배가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頓悟만 있고 解悟가 없으면, 음식을 먹기는 먹었으되 무슨 음식을 먹었으며, 그 음식이 무엇이며, 내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내 통장에 알 수 없는 돈이 입금되었다면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어리둥절할 것이다. 하지만 입금자가 누구라는 것을 아는 순간, 즉시 모든 의심이 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오롯이 ‘나’의 존재를 실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은 생각이 ‘나’를 먹어버린다. 나는 생각의 하수인이 되고 말며, 거기에 '나'는 없다.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말은 내가 생각을 하므로 세상 모두가 존재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 * * 내가 주인이며, 나를 알아낸 사람을 '부처(Buddha; one who is awake)'라고 한다. 부처는 생각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위대하다. 생각을 내 수하에 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생각을 멈추어보라. 3분만..

싯다르타의 목표는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도 처음엔 단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이치(理致)만을 알기 위해 출가(出家)했다. 그는 깊은 선정(禪定)과 고행을 두루 거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깨달았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가르침은 연기(緣起)를 거쳐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로 발전하면서, 결국 수천 명을 거느리는 불교(佛敎) 교주(敎主)로 등극했는데, 그의 제자 대부분은 고위층 지식인(知識人)이었다. 예수는 왜 요한을 찾아갔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성경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 단지 하늘의 소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는 요한에 이어 회개(悔改)를 말했고, 천국(?)을..

불교(佛敎)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이다. 정말 나는 없는가? 한술 더 떠서, 한 대 맞았다 해도 고 주장한다. 그가 그리 말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무아설(無我說)' 신앙에 근거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 브라만교(Brahmanism) 영혼 불멸 사상의 기초가 되는 아트만(Atman)을 부정하며 무아설(無我說)을 내어놓았다. 새로 생긴 가르침은 뭔가 크게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무상설(無常說)인데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무아(無我)가 역시 맞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무상설(無常說)인들 영원할까? 그것 역시도 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들이 믿는 윤회(輪廻)를 ..

"깨우침"에 대해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영향으로 힘을 잃어 자기의 깨우침을 의심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데, 아직 공부가 확실치 못하거나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결과이다. 대게는 심약(心弱)한 사람이다. 다른 경우는 그것으로 인해 심하게 자존감(自存感)의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는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밑바닥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하고 한치라도 의심의 소지가 드러난다면 즉시 와신상담(臥薪嘗膽)에 들어간다. 물러서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신도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의심받을 만한 소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만나게 된다. 깨우침과 함께 에너지 흐름도 예상을 넘을 만큼 증폭된다. 그리되..

얼마 전 열반에 들은 존경하는 선지식(善知識) 한 분은 자주 “연기(緣起)는 무기(無起)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이해가 어렵지만, 그 말은 사물(事物) 모두는 연기, 즉 인연(因緣)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여섯 개의 감각작용(六根)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대상(六境)을 만나야 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놈(六識)이 있어야 합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존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 간단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주체가 됩니다. 깨달음은 생각과 언어(言語)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느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개념(槪念)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