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외로움에 대하여 본문
역사 이래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막연하게 그것을 피하려고만 해왔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 아닌 가면을 쓰고 타자들의 배경 속에 자신을 감춘 채 그것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애를 씁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맹렬한 활동가도, 학문, 예술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도 외로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감싸보려 해도 감싸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시(直視)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뿐입니다. 일이나 사회활동 속에 파묻혀버리든, 담배와 술, 약물에 중독되든, 교회나 사찰, 히말라야로 피하든 도망가기는 매일반입니다.
그것은 묘한 속성이 있습니다. 기피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섭니다. 도피처가 어디이든 간에 그곳이 영구적 안식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수가 서서히 먹이에 다가서듯 우리를 위협합니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동떨어져 어디에도 안주(安住)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느낌, 공허한 무력감이며, 방치하면 결국은 좌절감,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맙니다.
우리는 왜 외로운가?
첫째, 왜 외로운지 진지하게 알려 하지 않습니다. 관심사가 언제나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소홀합니다. 자기를 위해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남는 시간 모두를 오락이나 예술, 신앙 등 자기가 아닌 다른 것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와의 만남이 뜸해지면 자연스럽게 자기 컨트롤이 약해지고 결국은 ‘자기 부정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버립니다.
먼저 외로움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그것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찾아오면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것과 한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과 나는 하나입니다. 그것과 한편이 되면 편안해집니다.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자주 만나서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신에게 자주 질문해야 합니다. 자기와의 만남이야말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그것보다 더 ‘자기 긍정적’ 이 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긍정이 마음에 스며들면 우선 얼굴과 행동이 달라지고 그곳에 외로움은 붙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들숨, 날숨의 호흡관찰을 권합니다. 호흡을 관찰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편해지고 에너지가 생깁니다. 아무 시간이나 아무 데서나 호흡으로 천천히 기운을 당겼다 밀었다 해 보세요, 그것보다 더 자기와 잘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호흡이 곧 생명이고,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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