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깨달음 (165)
谷神不死
깨닫는 일 외에는 세상에 할 일이 없으며, 깨닫고 나면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깨달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매일 태극권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몸과 마음을 떠나야 하는데, 그런 건 왜 하느냐?"고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답했다. "그리 말하는 그대도 밥은 먹지 않는가? 이해될는지 몰라도, 나에게 태극권은 밥 먹는 일과 같다." 깨달음 흉내를 내느라 목욕도 안 하고 지내던 사람 몇을 나는 알고 있다. 옆에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몸과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하고, 목욕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하고, 사랑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하느라 바빠서 깨달음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이 문제는 문제지만 말이다.
사촌이 땅을 샀을 때 일어나는 반응을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 아무렇지도 않은 경우: 비록 사촌이라 해도 나하곤 아무런 이해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경우이다. 둘째, 기쁘다, 축하하고 싶다, 안심이 된다: 이제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거나, 막연하기는 하지만 혹시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셋째, 불편하다, 속상하다: 이유는 그와 내가 비교되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니라서 속상하고, 내 것이 있어도 그의 것이 더 좋으면 불편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는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첫째는 아무 감흥(感應)이 없다. 깨달음이 무언지도 모르고, 안다 할..
깨달음은 당신 자신의 것이다. 누구의 말이나 글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神이든 부처든, 그 누구도 깨달음을 줄 수 없다. 까닭 없이 추상적이면 100% 실패한다. 그것은 교리(敎理)나 어떤 신앙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을 위해 가족과 생업을 버릴 필요는 없으며, 어디론가 가지 않아도 된다. 체험에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며,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당신의 알아차림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적어도 그것을 위해선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생각을 줄이고, 주시자(注視者)로 남기만 하면 된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자유로움 속에서 거리낌 없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철저히 깨우친 것이므로, 그다음부터는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걱정하는 놈이 없고, 괴롭기는 괴로운데, 괴로운 자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걱정하는 자가 없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철저하게 규명해야 합니다. 보는 자가 없다면 어찌 보이는 대상이 있겠으며, 듣는 자가 없는데 어찌 들리는 대상이 존재하겠습니까?
삼매(Samadhi)에 들 때, 우리는 고요함과 안정감 속에 있게 됩니다. 그때 빛(눈을 감았는데도)과 소리를 체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빛을 일부 신앙단체에서는 "니미따(Nimitta)"라고 하여 깨달음의 전조(前兆)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수행 도중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 고무적임은 틀림없지만, 그것만을 깨달음과 연결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수행의 여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며, 일상사 어느 것도 깨달음과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를 닦다 보면 몸의 일부(손)나 온몸에서 열감이 나기도 하고, 전기와 자기가 합해진 듯한 것을 실감(實感)합니다. 그것은 필요할 때 언제라도 느껴지는데, 통기(通氣)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기감(氣感)이라고 합니다. 보이..
仙道에는 '깨달음'이란 말이 없다. 단지 '소주천(小周天)'만을 강조한다. 선도의 모든 행법은 소주천을 向하고 있다. 소주천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전신(全身)의 에너지(氣) 타통과 부족함이 없는 넉넉함이요, 다른 하나는 실존(實存)을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다. 仙道의 '개안(開眼)'이란 바로 알아차림의 회복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육안(肉眼), 즉 물질계를 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비 물질계, 절대계(絶對界)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인간이 영장(靈長)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안(靈眼; 神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견성(見性)이 불가능하며, 또한 얻어진 깨달음 역시 유지하기 어렵다. 안목(眼目)을 얻는 데 소주천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이 ..
지관(止觀)을 알면 깨달음이 보인다. 깨달음에 이른다는 셀 수 없이 많은 방편(方便)이 있어도, 알고 보면 하나같이 모두 止觀으로 수렴(收斂)한다. 지(止)란 - 그치다, 멈추다 - 라는 뜻이며, 관(觀)이란 - 보이다,인식(認識)되다 - 라는 의미가 있다. 지와 관은 연기 관계이므로,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가 있으므로 관이 있고, 관이 있으므로 지가 있다. 그 둘은 편의상 그리 이름하였을 뿐이며, 사실상 그 둘은 하나다. 그러므로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름이 걷히면 저절로 태양이 드러나듯, 지는 그대로 관을 부른다. 망상(妄想)이 그치면 굳이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저절로 보이는 것이 자성(本性)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구조되어 ..
선도(仙道)는 견성(見性) 같은 것으로 유난을 떨지 않습니다. 애쓰지 말고(自然無爲), 잠시 생각만 내려놓으면 드러나는 것이 자성(自性)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쓸데없는 것(교리)을 만들어 그것에 꿰어 맞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와 비슷합니다. 사람들, 특히 뭘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이처럼 가식 없이 보면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自性이니 말입니다.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던 그것, 늘지도 줄지도 않고,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은 그것, 쓸데없이 이해할 필요도 논리와 합리로 꿰맞출 필요도 없는 그것,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을 내리고(Don't think) 그냥 보면(Just look)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自性입니다..
기운(氣運) 떨어지고, 몸이 여기저기 아파 오면, 돈이고 사랑이고, 다 필요 없어진다. 게다가 기억도 가물가물, 치매 소리까지 듣게 되면 이러려고 내가 그리도 애를 쓰고 살았나, 만감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운이고, 기운만 있으면 코로나도 어찌할 수 없다. 기운이 없으면 그까짓 깨달음이 무슨 소용인가? 기운이 난조(亂調)를 하면 그것도 왔다 갔다 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기운부터 챙겨야 한다. 기운이 돌면 여기저기 아프던 것도 슬슬 꼬리를 내린다. 속이 불편해 진수성찬이 그림의 떡인데, 명품 옷은 무엇이고, 값비싼 장신구는 또 무엇인가? 이 목숨 사라지면 그 무엇도 아닌 것에 왜 정성을 바쳤던가, 후회만 남는다. 기운부터 챙겨라. 일어나 걸을 힘만 있으면 가능성이 있다. 기운부터 챙기고 나..
사실 '깨달음'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열등감이 생길 때, 우울(憂鬱)이 밀려올 때,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바로 ’나‘입니다. 걱정거리, 공포심이 생길 때의 그놈도 나는 아닙니다. 공포를 알아채는 놈이 바로 '나'입니다. 열등감이나 우울,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을 '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잠시 왔다가 제 갈 길을 가는 놈들입니다. 하지만 '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이 오는지 가는지를 알아차리는 놈이 바로 나입니다. 돈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듯,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