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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죽기 직전, "시간에 속았고, 세상에 속았다"고 한탄하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려면 변치 않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명상(冥想)입니다. 살다 보면 좋았다, 나빴다, 더러는 외롭고, 불안하고, 우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 허망(虛妄)한 것들을 따라 살지 말고, 마음을 중심 자리에 두어 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모두 쓸고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명명(明明)히 살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쁘면 기쁨을 알아차리고, 슬프면 슬픔을 알아차리는 '그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일으키고, 허무는 힘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고 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장난에 속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늘 밝게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선도(仙道)에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없다'는 말은 '이성(理性)이 없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Youval N. Harari라는 유대인 교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설(說)은 기독교가 만든 신화(神話)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벌해서는 안 되며, 神이라 할지라도 그를 지옥에 보내서는 안 됩니다. 자유의지는 神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잘라 말하여, 그 길은 오직 견성(見性), 즉 깨달음뿐입니다. 깨닫기 위해선 생각을 모두 내려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경전(經典)을 외우거나 명상(冥想)만을 통해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당신이 가진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깨우침을..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선도(仙道)를 선택하였는가?" 묻는다면 운명적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마치 이과(理科)의 사람에게, "당신은 어찌하여 골치 아픈 수학을 재미있어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우치려 시도하는 공부법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에너지(氣) 공부를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는 공부다. 자아(自我) 탐구하는 법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에너지(氣) 수련법도 그 갈래가 수없이 많아, 문파별로 자기들이 하는 수행법이 으뜸이라고 하지만, 문외한이 볼 때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렇다면 세상엔 왜 수많은 수행법이 있는가? 그것은 각기 다른 많은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Mantra..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을 내려놓으라' 했습니다. 우선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이것은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무엇인가 있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상심입니다. 이것을 찾는답시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것은 한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어야 나는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피하기 어려운 성가시고 힘든 일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고민만 하지 말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미래에 지장을 줄 만큼 중대한 일인가?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아니다' 하는 일에는 손대지 않습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인생이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무엇에나 용감(勇敢)해져야 합니다. 처음엔 망설여지지만. 무엇이든 몇 번만 반복되면 내 스타일이 됩니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성(自性)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소주천(小周天)이 무언지 알게 되고, 소주천을 먼저 이루면 저절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납니다...
마음 공부를 한답시고 몸을 소홀히(학대) 하는 사람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만하며, 그런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시타르타도 처음 여러 해 동안 그런 어리석음(愚)을 범했는데, 몸 관리를 시작하고 나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선도(仙道)는 몸 공부로 마음 공부를 하고 마음 공부로 몸 공부를 한다. 에너지(氣)를 중시하며, 통기, 축기, 운기로 공부를 진행하는데, 일견 몸 공부인 것 같아도 사실은 마음 공부로 직행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고로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그것만 알아도 깨달음은 바로 문 앞이다.
"알겠다"라고 말할 때는 'I know'가 아니고 'I see'이다.'I know'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때이고, 지금 알게 된 것은 'I see'이다.See라는 단어는 '본다'와 '안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본다(See)'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들어보고, 맡아보고, 먹어보고, 맛을 보고, 느껴보고, 알아본다.그러므로 견성(見性)에서의 見은 단지 '본다'는 의미 외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다.하지만 그것이 관념적이어선 안 되며, 실제의 체험이 필요하다.그래야 見(See)의 본래 의미와 부합되기 때문이다.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을 때, '그것(性)'을 단지 '본다'고 했지만선사(禪師)들은 그것을 Clear 하게 밝히지 않고, 은유(隱喩)를 사용한다. 그..
노자(老子)는 일견 냉정해 보입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핵심만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그는 "마음은 허(虛)하게, 배는 실(實)하게(虛其心實其腹)"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선도(仙道)만의 깨우침과 동시에 장생불사를 동시에 얻는 묘책(妙策)입니다. 仙道에는 마음을 비우는(虛) 별도의 복잡한 행법(行法)이 없습니다. 단지 배를 實하게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이 비워지도록 합니다. 단전을 지키는 것(意守丹田)이 그것입니다. 처음엔 정확한 단전(丹田) 자리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굳이 애를 써 숨을 조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랫배(下腹)의 중앙에 마음을 두고 천천히 숨을 지키노라면 얼마 안 가서 자연스럽게 丹田이 드러납니다. 그 자리가 에너지의 중심 센터입니다. 태식(胎息..
명상 중 하느님(?)을 만났습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허공(虛空)과 내가 합해지는 체험을 했습니까? 그리고 나선 생각과 생각 아님을 구별하는 눈이 생겼습니까? 그런 상태를 '눈을 떴다'는 뜻의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눈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은 아닙니다. 눈이 밝아지지 못하다면 공부를 좀 더 해야 합니다. 그 눈으로 진리(眞理)를 보았다면 한번 말해 보세요. 그 진리란 놈이 어떻게 생겼습디까? 운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운전자는 산도 보고, 강도 보고, 다리도 봅니다.
당신의 머리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마(達摩)가 혜가(慧可)를 눈밭에 세우고 스스로 팔을 잘라 바친 후에야 문을 열어준 이유도 그 정도가 아니라면 깨달음에 입문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에서 서울로 가려면 일단 방향이 동쪽을 향해야 한다. 아무리 지구가 둥굴다 해도 서쪽으로만 가서는 이번 생에 서울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정말 깨달음을 원한다면 깨달음 쪽으로 머리를 두라. 다시 말하지만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쉽다.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