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깨달음 (162)
谷神不死
남들이 갖지 못한 것, 나만의 소유가 있는 사람은 느긋하다. 값비싼 명품(名品)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그것처럼 말이다. 누구도 부러워하는 미모(美貌)의 부인을 둔 사람이거나, 남다른 능력(돈과 권력)의 남편을 둔 사람, 그 둘은 한동안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사람들은 조바심치지 않는다. 자존감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절륜의 정력을 가진 남자, 소위 명기(名器)를 지닌 여성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매력이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유한(有限)하다. 조만간 시들어 버릴 것들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돈이 없어도, 집도 절도 없어도, 당당하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 썩지 않을 보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기력(氣力)이 없..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말로는 떡을 해서 천하 사람을 다 먹일 수 있습니다. 말로는 "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 믿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내가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그리하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무아(無我)의 주장은 실제로 자기가 없어진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칠십 평생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리 말했다고 맥없이 따라 해선 곤란합니다. 그 논리(論理)는 허구(虛構)입니다. 마치 마약(痲藥)과 같습니다.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한 말입니다. 정말 내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
가장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왜 사는가?",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합니다. 대답이 어려운 이유는 사는 목적은 바로 삶 자체이기 때문이고, 나는 바로 여기 "이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간단한 것을... 물론, 이 몸과 이 마음이 나는 아니지요. 그것들은 나의 것, 나의 소유물로서 나의 조종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면 "왜 사느냐?"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 몸, 내 마음(受想行識)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아닌가요?
우리는 에너지 속에서 삽니다. 에너지는 생긴 적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지만, 모든 일을 합니다. 그것은 빛을 주고, 열(熱)을 주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사랑도 안 되고, 심지어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지만, 모든 작용의 주체(主體)가 되고 깨달음으로도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그것이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우리말로 '기(氣)'라고 합니다.
선도(仙道)는 '깨달음(見性)'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단전(丹田)만을 지키라(意守丹田)'고 한다. 선도는 '지관(止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止(사마타)로 시작해 觀(위빠사나)으로 끝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몰입(沒入)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단전에 마음을 두는 것만으로 힘쓰지 않고 내면세계에 몰입(三昧)한다. 특별한 자세(정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를 일으켜 몸을 다스리는(調身) 일련의 동작들이 있으며, 숨을 조율하는 법(調息)이 있고, 기의 흐름을 관조하는 것으로 마음이 안정(調心)을 찾는다. 사실상 그것들 모두는 한통속으로, 우리를 해맑고 고요한 자리(空寂)로 인도한다. 선도는 세인(世人)들에게 건강 장수법 내지는 신통력 개발법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삽니다. 그래서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권력을 가지려는 것도, 명예 얻는 것도, 결국은 그 속에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 여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자기 여자로부터 무시당하면 그는 자기를 알아줄 여자를 찾아 떠나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고난 바람둥이는 빼고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인기를 누린다 해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심란한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주천(小周天)은 다릅니다. 타인의 인정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최고봉을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쉬운 것이 없으..
깨달음이란, 자기 성품(性品)을 만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자성(自性)입니다. 초월적 힘을 받더라도, 받을 "내"가 있어야 합니다. 받을 "나"가 분명치 않으면 초월적 힘이 오더라도 어느 자리로 내려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이고 소중한 것은 진여자성(眞如自性)입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늘 위아래에 홀로 존중받는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나를 깨우치는 순간, 선계(仙界)로 이동하여 불멸(不滅)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되어야 한다. 무아지경에서 얻은 정보들이 깨어난 후 표현이 불가능하거나 질문자의 질문을 적절히 해소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역사 이래 깨달음을 얻은 선배들도 내내 그것을 표현해 왔다. 비록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말하지만... 진정 무아(無我)가 맞다면, 깨닫는 자도, 질문자도, 또 질문에 대답하는 자도 없어야 맞다. 내가 없다면 표현은 누가 한단 말인가? 無我... 성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나에겐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음을 알아채는 놈이 오매일여하다.
깨달음을 사모하고, 에너지(氣)의 중요성을 깨친 사람 1%만 있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개벽이라 하며, 열 개(開), 열릴 벽(闢)이라 씁니다. 개벽은 세상을 망하게 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벽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있습니다. 개벽은 사악(邪惡)한 신앙단체의 교세(敎勢) 확장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벽은 신앙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먼저 신앙부터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신앙은 그 뿌리에 이기주의와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깨달음과 무한한 에너지를 함께 닦아야 사랑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그리되어야, 나누어도 나누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재물과 권력이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중..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다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깨우침은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둔 열쇠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를 찾아 어디로 길을 나서겠습니까? 세상에 깨달음과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을 멈춰야 합니다.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놔야 합니다. 깨우침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단지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