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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자.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자.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솔직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에게도 솔직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는데 왜 남의 눈이 필요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솔직해지자. A를 A라고 말하고, B를 C라고 말하지 말자. 과감히 벗어나 보자.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졸리면 졸립다고 말하자. 주입받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자. 가식을 모두 벗어버리자. 세상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순간순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다. 그리되는 순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된다. 자유를 알게 된다.

"깨달음에만 신경 쓰면 돼. 병(病)이 오면 받아들이고 그냥 살아. 부처님도 앓다가 돌아가셨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생 문제없이... 병 없이 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늘 건강관리 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보시(布施)는 남에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이에게 이 몸과 마음도 외물(外物)이 아니던가요? 나하고 제일 가까운 이웃이지요. 사람은 몸이 아프면 에고는 더 강화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혹 에고가 정말 사라졌더라도 몸과 마음은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한동안은 몸과 이 지구에서 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당당하게 말하면, 당당해집니다.말(正語)은 깨달음과도 연결됩니다.우선 세 마디만 바꿔 말해봅시다.1. 좋은 것 같아요. ⇒ 좋습니다.2. .. 같은 경우에는 ⇒ ...의 경우에는3. ㅇㅇ신문의 ㅇㅇ기자라고 합니다. ⇒ ㅇㅇ신문의 ㅇㅇ기자입니다.깨어있어야 합니다.말이 중요합니다.깨어있음은 말에서부터 시작하니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에너지 장악이 부족하면 아직 편안함을 얻었다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명예는 있어도 땟거리가 부족한 것과 같다. 그리되면 비록 존재는 깨우쳤다 할지라도 에너지를 주재(主宰)할 수 없어 삶에 닥치는 불편함은 여전하다. 性(理)과 命(氣)은 서로를 도와 존재를 완성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밝게 리(理)의 세계를 깨우쳤다 할지라도 기(氣)가 받쳐주지 못하면 스스로 밝을 수 없으며, 에너지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理가 밝지 못하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氣의 운영을 공부하는 것이 순서이며, 축기(蓄氣)와 운기(運氣)가 되었다면 반드시 밝은 깨우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성(性)과 명(命)은 균형을 잃으면 안 된다. 어느 한쪽이 기울면 나머지 한쪽마저 흔들리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의 태도 만년(萬年) 전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나 마음은 같다. 그 마음에 무엇이 덧입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캐릭터가 결정된다. 마음이 바뀌면 외모(外貌)도 바뀐다. 눈매가 바뀌고 피부가 바뀐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마음의 속성을 안 사람은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마음의 속성을 알고 그런 것으로 인정하고 살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바꾸려 하지 말라. 그대로 두고 바라만 보라.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다.

수행을 위해서는 일단 잡념의 통제가 필요하며, 수행자는 인연 따라 각기 자기 기국(器局)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어휘(呪文과 챈팅)를 외운다거나, 일정한 동작(3000배, 수피댄스)을 반복, 그리고 호흡의 관(觀), 간화선(看話禪) 등 명상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순수의식(Samadhi)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남김없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겠지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인총림의 조실(祖室), 성철스님은 화두(話頭)가 여여(如如)한지에 중점을 두어,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로 물었다고 한다. 법거량(法巨量)을 통해 가늠하는 전통을 버리고 말이다. 선도(仙道)..

깨달음을 위해선 쓸데없는 인연(因緣)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의식주(衣食住)도 단순화해야 한다. 머릿속은 깨달음에 대한 기대로 채워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산다. 에너지는 깨달음을 위해 주로 사용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 가급적 묵언(默言) 생활이 바람직하다.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 생각지 말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말을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입속에 진언이 살아 움직인다면 생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살아서 무엇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를 늘 되새기라. 허망(虛妄)하지 않은 삶이 될 것이다.

眞理는 손대지 않아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로인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는 "진리가 나희를 자유케 한다(요한 8:32)"고 했습니다. 眞理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특정한 장소에 가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 오롯이 살아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가 진리이고,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眞理는 성직자의 말 속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 속에... 아니,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나'는 물과 같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는 없다. 깨달을 것은 없다고? 그럼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나는 물처럼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있음은 보는 자가 있는 것이요, 들음이 있음은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 비행기 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배와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물처럼 모양은 없어도, 엄연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