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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혼자 있는 것이 유리한 이유 구애받음이 없이 나를 풀어둘 수 있다. 남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과만 대화할 수 있다. 적나라한 에고(ego)를 만날 수가 있다. 깨달음(自性)을 만나기가 유리하다. 단, 먼저 에고부터 허심탄회하게 만나야 한다. 더 이상 에고와 할 일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성(自性)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천만번 외워도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하지만 보고 듣는 하나하나에 '도대체 누가 듣고 보는가?' 의문이 생긴다면 그는 상근기 중 상근기(上根器)이다. 마음속을 살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면 그는 깨달음이요, 단전(丹田)에 시원한 불꽃이 피는 것을 알아챘다면 신선(神仙) 세계가 코앞이라. 맛있는 곰탕 국물을 내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한 그릇 맛나게 퍼내는 것이 무슨 시간이 걸리랴! 깨달음이 그러하고 소주천(小周天)이 그러하다.
선각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깨달음은 쉽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은 얻는 것도, 찾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기 그렇게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만 하면, 바로 보이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는 생각의 방향이 엉뚱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돈과 명예에만 꽂혀있다. 나머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것이 그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또한 “나는 생각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별로 유명치 않은 말이 있다. 깨달음 자는 생각 없이 존재한다. 당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말로만 '내가 없다'라고 한다고, 내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있습니다. 나에게 욕하는 소리가 개 짖는 소리로 들리고 송곳으로 찔러대도 아픈 줄을 몰라야 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고 배웠다고 내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나는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실존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됩니다. 우선 눈에 보여지고 귀에 들리는 것, 눈과 귀, 보고 듣는 기능은 내가 아닙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라도 있으려면 내가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내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찾는답시고 별다른 짓을 하지 마십시오. 이해는 하지만, 여행도 떠나지 말고, 템플스테이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 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으며,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
깨달음을 얻고 나면 경(經)을 읽어야 합니다. 엷은 깨달음이 모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기 경전(初期經典)도 읽고, 대승경전(大乘經典)도 읽고, 전등록(傳燈錄)과 조사어록(祖師語錄)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습니다. 논어(論語), 도덕경(道德經)도 읽고, 성경(聖經)과 쿠란도 읽고, Veda도 읽고, 크리슈나무르티, 라마나 마하리쉬, 하라하리난다 글도 읽고, 요즘 수없이 등장하는 서양의 깨달은 이들 글도 기회가 되는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나의 경계(境界)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꼭 선지식(善知識)과 법거량(法擧量)을 해야만 탁마(琢磨)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해 관심 가지는 것도 훌륭한 탁마요, 보임(補任)이 됩니다. 그래야 편견에 머물지 않고 넓게 ..
시타르타는 나무 밑에 앉아 새벽별을 지켜보다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심(Don’t think))으로 지켜볼 수 있느냐로 깨달음의 성패가 갈리듯 단전 역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지켜보는 것(Just look)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의수단전(意守丹田)이라 합니다. 丹田이 깨어남과 견성(見性)은 한통속입니다. 둘 다 주시자(注視者)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丹田은 지켜보는 것만 가지고는 2% 부족합니다. 꾸준한 외단공(外丹功)으로 기운의 유통을 시켜줘야 합니다. 펌프 물을 끌어 올릴 때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하듯 단전 역시 마찬가지로 기본 에너지(氣) 충전이 필요합니다. 마치 스마트폰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지금 50세라면 단전은 50년 동안을 휴식 상태로 있었습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깨어나기 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입니다. 세상엔 그 문제를 해결한 두 분이 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두 분 중 하나는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생겨난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장 25, 26절) 아주 간단합니다. 믿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26절 끝에 말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타르타, 즉 부처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그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구구한 이야기는 빼겠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중심은 “나는 없다” 입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의 핵심 삼법인..
에고(ego)를 자아(自我)와 동일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自我 = 에고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에고는 自我의 모두가 아니다. 그것은 가늠키 어려운 自我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에고를 감시 감독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상 이타적(利他的)인 것과 이기심(利己的)은 나눌 수 없다. 이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기적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에고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고는 결코 우리의 생존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利己的인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에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 생명체(生命體)의 기본은 (利己的)이기에 에고를 없앤다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깨달았다고 해서 에고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