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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지혜로운 자의 태도 만년(萬年) 전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나 마음은 같다. 그 마음에 무엇이 덧입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캐릭터가 결정된다. 마음이 바뀌면 외모(外貌)도 바뀐다. 눈매가 바뀌고 피부가 바뀐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마음의 속성을 안 사람은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마음의 속성을 알고 그런 것으로 인정하고 살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바꾸려 하지 말라. 그대로 두고 바라만 보라.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다.
수행을 위해서는 일단 잡념의 통제가 필요하며, 수행자는 인연 따라 각기 자기 기국(器局)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어휘(呪文과 챈팅)를 외운다거나, 일정한 동작(3000배, 수피댄스)을 반복, 그리고 호흡의 관(觀), 간화선(看話禪) 등 명상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순수의식(Samadhi)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남김없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겠지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인총림의 조실(祖室), 성철스님은 화두(話頭)가 여여(如如)한지에 중점을 두어,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로 물었다고 한다. 법거량(法巨量)을 통해 가늠하는 전통을 버리고 말이다. 선도(仙道)..
깨달음을 위해선 쓸데없는 인연(因緣)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의식주(衣食住)도 단순화해야 한다. 머릿속은 깨달음에 대한 기대로 채워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산다. 에너지는 깨달음을 위해 주로 사용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 가급적 묵언(默言) 생활이 바람직하다.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 생각지 말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말을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입속에 진언이 살아 움직인다면 생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살아서 무엇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를 늘 되새기라. 허망(虛妄)하지 않은 삶이 될 것이다.
眞理는 손대지 않아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로인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는 "진리가 나희를 자유케 한다(요한 8:32)"고 했습니다. 眞理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특정한 장소에 가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 오롯이 살아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가 진리이고,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眞理는 성직자의 말 속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 속에... 아니,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나'는 물과 같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는 없다. 깨달을 것은 없다고? 그럼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나는 물처럼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있음은 보는 자가 있는 것이요, 들음이 있음은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 비행기 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배와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물처럼 모양은 없어도, 엄연히 있다.
지식인(교수)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말하고, 지혜자(성인)는 어려운 내용도 상대의 눈높이를 따라 쉽게 말한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쉬운 이야기를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쉬운 이야기는 쉽게 듣고,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정리해 듣는 습관을 들이라.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가? 쉬운 것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버려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버릴 것 역시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들은 하나, 사실은 얻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깨달아 있으므로 다시 깨달을 수는 없다. 이미 부처인데 어찌 다시 부처가 된단 말인가? 단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쓸데없는 의미 부여 하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기만 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빛이면 빛이고, 소리면 소리고, 느낌이면 느낄 뿐이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데, 무슨 버릴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
실존주의(實存主義)란, '나'다운 나'를 만나는 시도이다. '나'다운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時空)에 구애받지 않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낸 것을 가리켜 "깨달음"이라 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선 본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과감히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것, 몸과 마음 그리고 신앙 등등등... 부정이 무르익을 때, 오롯한 '나'다운 '내'가 출현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각(自覺)과 결단을 통해 '실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선 실천을 빼놓을 수 없다. 실존(實存)이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고통(Suffering) 또한 없다. 무아를 실존이라 주장하는 것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돈 벌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당신에게 심어놓으려 했던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역사 이래 왜 살아야 하는지 알아낸 사람은 없다. 왜냐면 삶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목적으로도 살 수 있다. 판검사나 의사가 목적일 수 있다. 사업가, 정치가가 될 수도 있다. 그 선택권은 언제나 당신에게 있다. 하지만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었건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선 자기 자신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 분주했기 때문이다. 삶의 순..
알아챔 민정암과 함께하는 仙道(TCR) 특별 과정 TCR은 선도에너지 교실(Tao-energy ClassRoom)의 약자이며, 민정암 TCR은 민정암 공부 50년의 결실입니다. 민정암 선생의 내공(內功)이 실현(實現)되는 당신과의 일대일(1:1) 특별 장소로서, 기초 수련 후 당신은 매일(everyday) 원격(remote-control)으로 막힌 氣를 열고, 부족한 氣를 보충받게 됩니다. 참석은 선도연맹 회원에게만 허락되며(가입 필수), 외기방사(外氣放射)와 기침(氣針)이 시술됩니다. 내면(內面) 세계가 변하지 않고 현실(現實) 세계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 문제가 있거나, 축기(蓄氣)가 필요한 사람(小周天 준비), 그리고 오염된 에너지, 즉 부정적인 기운(濁氣)의 빙의(憑依)로 운(運)이 자주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