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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인간은 욕망과 의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예술, 학문, 종교가 있다.욕망과 의지, 이성은 마음 작용인데, 이성이 의지 욕망의 위에 자리한다. 이성(理性)이 최고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종교(宗敎)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이 아니다. '신앙(信仰)'을 가리켜 최고의 가르침인 '종교(宗敎)'라고 칭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다분히 욕망적(慾望的)이며, 그것을 종교라 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독이다. 인간은 욕망(慾望)의 동물이다. 그리고 의지(意志)의 든든함에 따라 욕망의 성취도가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의지의 감독역인 理性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얼마나 그것을 발현시키며 사느냐에 그 사람의 가치가 있다.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느냐로 그 사람의 격(格)이 가늠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나’의 존재를 실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은 생각이 ‘나’를 먹어버린다. 나는 생각의 하수인이 되고 말며, 거기에 '나'는 없다. 내가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말은 내가 생각을 하므로 세상 모두가 존재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 * * 내가 주인이며, 나를 알아낸 사람을 '부처(Buddha; one who is awake)'라고 한다. 부처는 생각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위대하다. 생각을 내 수하에 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생각을 멈추어보라. 3분만 생각을..
진리(眞理)가 우리의 관심사이건 아니건, 우리는 시종일관 진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이래 진리는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어 왔으며, 진리를 구하려 일부러 역경에 들어가며, 진리를 지킨다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까지도 버려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작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허탈할까? 진리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진리로 먹고, 진리로 자며, 진리로 인해 세상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탐구할 수 있는 것도, 신앙해야 할 것도, 애써서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있는 이것'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채는 이것..

‘우리 그만 일어나 커피나 한잔 마시러 갈까?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근사한 찻집을 소개하지.’ 몇 걸음 떼자 장독대가 가지런한 넓은 정원의 웅장한 한옥이 나타났다. ‘정말 대단하네요. 인사동 ‘경인’을 자주 다니는 편인데, 누가 여기에 이렇게 멋진 전통가옥 찻집을 만들었을까? ‘드리우니’라..... 이름도 그럴듯하네요. 앞으로 강화의 명물이 되겠어요.’ 요즘은 도농(都農)을 불구하고 커피숍 수준도 상향조정이 됐나 보다. 커피 맛도 나쁘지 않았고, 좌석도 편안했다. * * * * * ‘오기 전에 노사님에 대하여 조사를 좀 하고 왔습니다. 신문에 소개된 것 외에 핫(hot)한 것이 하나 있던데요? 근간에는 불교(佛敎)의 영역을 침범하고 계신다고요? 상도의(?)를 어기는 것 아닐까요? 알고 지내는 불교대학의 ..
깨달음은.. 삶이 즐거운 사람에게, 이 정도면 살만한 사람, 삶이 허무한 사람, 삶이 그저 그런 사람, 삶이 지루한 사람,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 그리고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깨달음은 진정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오게 되어있다. 깨닫고자 한다면, 왜 나는 깨어나야 하는가... 진정 나는 이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나?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무엇도 포기할 수 있나를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나머지 生은 거기서 나온 답에 따라 살아가라.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눈 앞이 밝아지는 등 예기치 못한 경계(境界)를 보았는가? 긴장이 풀리고, 가슴이 시원히 뚫리는 체험이 있었는가? 궁금하던 것들이 알아지기 시작했는가? 아직은 아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컴컴해지고 답답해질 수 있다. 멍하니 표류하던 마음이 금방 자리를 잡는가? 왠지 모르게 기쁨이 피어나고 늘 감사하며 살게 되었는가? 성공과 실패에 별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는가? 이것을 타인과 공유하고픈 마음이 강한가? 건강이 날로 날로 좋아지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있는가? 견문각지(見聞覺知)가 하나 하나 깨우침과 연결 되는가? 그렇다면 바른 궤도(軌道)에 들어섰다고 할 만하다. 계속해서 가고 또 가라.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가 존경받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심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누구의 자손이고, 이름은 김아무개고, 한국에 살고 있고, 모모 대학의 교수이고...神의 피조물이거나 원숭이의 진화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스스로 '깨달은 자'임을 자처하며, "너는 누구냐?"의 질문과 답을 준비한 후 사람들을 희롱하는 것을 재미로 삼으며 사는 주제넘은 인사도 있다. 세상에 "나는 누구?"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할 사람은 없다.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언어를 떠난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사(禪師)들이 "동산수상행"이니, "뜰앞 잣나무"니, "삼서근", "차나 한잔 하시게"하는 힌트로 ..
깨달음이 있으면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전(事前)이라 해서 약점들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후(以後)엔 그것들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온다. '공부는 초견(初見)을 하고 난 후부터'라는 말이 맞다. 눈이 감긴 상태에서는 아무리 애써 정진한다 할지라도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안목(眼目)이 생겼다는 말은 보고 싶은 것들이 보인다는 뜻이며, 제대로 보고나면 예전의 답답함들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도 훤히 보인다. 대개 일견(一見)을 하고 나서는 그 고요함과 편안함에 안주하여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인사들이 적지않지만 그것 역시 무지(無知)의 소치다. 그 후 더 큰 공부 기회를 찾아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소 밝아졌다 할지라도 에고가 완전히 사라진 건..
살아가기 위해 충분한 학식이, 재산이, 아름다움이, 지위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에게 '깨달음'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악세서리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에게 '깨달음'은 중하지 않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깊은 학식과 더 많은 재산, 매혹적 외모 그리고 더 높은 지위, 더 큰 능력이다. 깨닫기 위한 조건은 소유를 모두 내려놓는 것이며, 그때에야 '본래면목'이 드러난다. 어찌 어찌 그자리를 보았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에게 그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으며, 소유에 대한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순간 본래면목은 커튼 뒤로 숨는다. 그런 상태를 다시 '매해졌다' 고 하며 성서는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적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미련이 남아있는 한, 일견(一見)했다..
인도철학계열의 신앙의 주축은 어찌하든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어 윤회(輪廻)에서 벗어나는 것이 테마(Theme)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싯다르타'도 동일하다. 그의 가르침대로 세속을 떠나 수행하여 깨우침을 얻으면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자. 그들의 주장을 빌면, 깨닫고 나니 무아(無我),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즉 오온(五蘊 : 色受想行識)이 공(空)했더란 것인데, 그것을 그들은 니르바나(Nirvana), 즉 열반(涅槃)이라 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치부(置簿)한다. 그렇다면... 여태 미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