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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마음을 부처(卽心是佛)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자성(自性)이라 해서도 맞지 않습니다. 마음 없음이 도(無心是道)라고 해야 맞습니다. 마음은 커졌다 작아졌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허깨비 같은 물건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마음이라 일컫는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알음알이(識) 역시 왔다 갔다 합니다. 한없이 헷갈리고 흔들리는 것이 마음입니다. 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마음을 헤아리고 감찰하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놈을 잡으세요. 그놈이 주인공(自性)입니다.
과거 우리 학생들의 목표는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가 오고 있다. 아마도 그것만이 잘사는 길은 아니라라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십여 년을 고생 고생해 들어간 대학을 자퇴(自退)하는 학생 수도 늘어간다고 한다. 서초동에 가면 발에 치이는 것이 변호사이고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의원도 부지기수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 건너 뛰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왕위를 버리고 걸인(比丘)을 택한 된시타르타는 “나는 고(苦)와 그것을 없애는 법(滅)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쌩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가 과연 행복했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요즘은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숫자도 현저히 줄어 들고 팔겠다는 절이나 교회도 늘..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일러라, 일러라.” 공부처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겁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수행이 무르익어 터질 때가 다된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겐 너무 버거운 말이다.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자. 상대의 눈 높이에 맞춰 말해야 한다. 수행 길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헤매는 이유는 알아듣기 어려운 추상적인 말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진리(眞理)는 어렵지 않고, 추상적이지도 않다. 깨달음을 위해 신앙에 귀의하거나, 굳이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산으로 갈 필요는 없다. 그것이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가치가 없다. 수행자라 할지라도 역시 생활인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혜롭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을 현명하다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은 자기를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무엇에도 의지할 곳은 없습니다.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나 자신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알고나면 더 이상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은 없습니다. 늘 평화가 유지됩니다. 그것을 깨달음(見性)이라 합니다.
물이 흐리거나 파도가 치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물 밑의 풍경을 볼 수 없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잡생각에 시달리거나, 이런저런 것들(사상과 信仰)에 잡혀있다면, 자기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알 수가 없다. 몸과 마음, 그 둘은 나(The Self)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둘을 통하지 않고 자기를 찾을 수는 없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자기를 고요하게(入靜) 만들어야 한다. 그보다 더 확실히 몸과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과학이 증명하는 바이며, 오랜 세월 그것에 자기를 바친 수행자(修行者)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것을 몰입(沒入), 입정(入靜), Samadhi(禪定)라고 말하며, 그것은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적인 바램이다. 관건은 어떻게 자기를 고요하게 만드느..
글은 자기를 점검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글은 허심탄회한 나 자신과의 대화이다. 어려워 말고 글을 쓰자.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본다. 글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행운을 안고 살았는지 절감하게 해준다. 글을 쓰면서 종종 지난 세월을 끌어내 반성도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 글은 나의 희망, 나의 미래를 기정사실화 시킨다. 글 속에서 의지와 에너지(氣)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나는 글 속에서 영감(靈感)을 얻는다. 글은 언제나 나보다 몇 발짝 앞에 있다. 글 속에 각오가 있고, 다짐이 있다. 당신도 글을 써보기 바란다. 글을 쓰면 명상이 필요없다. 글 자체가 다이나믹한 명상이니 말이다. 글감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눈 뜨고 귀 세우면 글감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글 쓰기는 자기를 알게 ..
유위법(有爲法)이 없으면, 무위법(無爲法)은 없다. 무위법을 깨치기 위해 스승이 필요하다지만... 찾아헤매는 유위법이 없이 어디 가서 옳은 스승을 만날 것인가? 구하고 두드려야 한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감나무 밑에 몇 년을 누워 있어야 과연 감 하나가 입에 들어갈까? 무위법만을 숭상하고 유위법을 무시한다면, 백 년을 산속에서 고생한다 해도 손에는 허망함만 남을 것이다. 우선 바른 스승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위와 유위를 넘어서 있다.
당신이 네이버 카페 화도(선도연맹)에 가입하려 한다면 나름대로 목표를 가져야 한다. 첫째, 단순히 깨달음과 소주천을 이론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올려진 글들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자성(自性)을 깨우쳐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고요함(入靜) 수련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강화에서 Off- line으로 진행한다. 셋째, 단전을 열고 소주천까지 진행코자 한다면 간단치는 않다. 최소 주 1회 개인지도(태극권)를 받아야 한다. 지도는 회장 만정암의 감독 하에 자격있는 사범이 진행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내(존재)가 아닙니다. 생각을 쉬어야 실재(實在)가 드러납니다. 생각이 없어도 나는 존재합니다. 그것이 Fact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