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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우리가 무언가를 보려면 시각(視覺)이 필요하며, 필수적으로 초점이 맞아야 한다.아무리 훌륭한 카메라일지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면 영상을 재현할 수 없다. 나는 상당한 기간 수련했음에도 단전(丹田)에 자신 없는 사람이 매우 의아했다. 왜 그러는지 단지 집중력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다. 원인은 내부시각(內部視覺)을 사용하는 초점이었다. 그리고 그 초점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력 역시 필요한데, 여기서의 집중력은 예사 집중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완된 상태에서의 내부시각에 의한 주의력(注意力)이다. 절대적 주시(注視)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긍정적 사고를 발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단전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단전을 만날 수도, 힘을 발휘할 수..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국 국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파문당한 뒤 ‘교회가 아니라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했던 감리회 창시자 존 웨슬리(1703~1791)가 세상을 뜬 지 200년 만이었다. 다음 해인 92년 5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금란교회에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은 김홍도 목사가 이끄는 금란교회 신자 3,000여 명의 찬송과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스승을 구하려는 감신대 대학원생들의 절규 어린 함성은 수천 군중의 함성에 묻혀버렸고,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은 곧 억센 남성 신도들에게 예배당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감리회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1.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2. 돈,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3.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과식하지 않는다.4. 늘 자기의 습관을 알아챈다.5. 다른 것과 틀린 것, 그리고 종교와 신앙을 구별할 줄 안다.6. 축구를 찬다, 식사를 먹는다는 등 중복어를 피한다. 7. 의존적이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산다.8. 늘 긍정적이다. 삶을 밝게 보고 산다.9. 자기가 누군지를 잊지 않는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바라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금 행복한 사람에게 돈과 지위는 그리 중요치 않다. 무엇이 행복인가?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자기 확신이다.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행복을 구하라.사람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내 인생을 살아라.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첩경이다.

'알아챔'이란 특별하지 않다.심지어 파리, 모기도 알아채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챔'이란, 대상(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알아챔은 다르기 때문이다. '알아챔'은 당사자의 신앙과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기독교인과 불교인은 각자 알아챔이 다르다. '누가 알아채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알아채는 자를 알아채는 것에서 깨달음은 시작된다. 나의 편협(偏狹)함을 먼저 알아채야 한다. 알아차림을 말하기 전에 말이다. 그러지 못하다면 당신의 알아차림은 아무 소용이 없다.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는 좋은 것이다.심장에 열을 올려 활성화해 주기 때문이다.특히 혼침(昏沈)이 심한 사람의 경우 한 잔 정도는 수행에도 도움이 된다.하지만 커피를 마셔 불안이나 흥분 상태가 지속되거나, 수면에 지장이 있다면, 양을 줄이거나 삼가야 한다.커피 향이 마음을 끈다면 즐기기만 하라.그것만으로도 각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하지만 습관적으로 매일 여러 잔 마시거나, 커피 없이는 집중이 어렵다면 중독될 수 있다.내가 주인이 되어야지 절대로 커피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심근경색의 원인도 된다고 하니 그것을 마시고 심장 두근거림이 심해지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것이 있는 한, 마음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마음을 적정(寂靜)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바람을 불지 않게 하겠다는 것, 즉 자연을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바람은 불도록 두어야 하고, 흐르는 강물은 흘러가도록 두어야 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대로 두고, 다만 그것을 알아채기만 하십시오.열흘을 내리 부는 바람은 없고, 내가 보았던 강물은 어느덧 저 멀리 사라지고 없습니다.고락(苦樂)은 하나입니다.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알아챔의 기둥만 세워 놓고 있다면, 세상만사는 한편의 교향곡입니다.걱정하지 마십시오.오면 가게 되어 있고, 가면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그것이 이치(理致)입니다.

몸과 마음 중 주체는 무엇인가? 이성(理性)을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가? 살아있는 한, 몸과 마음은 하나로 묶여있어 분리할 수 없다. 그때,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정신이고, 그 사람의 정신은 기존의 몸에서 발현한다. 몸의 변화에 따라 마음도 변하며, 신체적 경험이 이성을 지배한다. 설득하려 하지 말라. 상대가 설득당하려 하지 않는 한, 설득은 불가능하다. 이성과 감정이 싸우면 99% 감정이 승리한다. 이성은 정신의 소속이요, 감정은 몸의 소속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변화시켜야 한다. 먼저 몸이 바뀌어야 한다. 몸을 바꾸지 않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익 우선, 이성 우선인 듯 해도 결정권은 신체 속에 녹아있는 감정에 있다.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어리석은 자는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견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없이 어찌 몸을 다스릴 수 있으며, 몸을 다스리지 않으면서 어찌 몸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집을 지으려 하는 사람은 곁에서 물리치시고, 우선 쉬운 쪽부터 시작하십시오. 몸 다스리기가 편한 사람은 몸부터 바로 잡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용이한 사람은 자기 마음부터 항복 받으십시오. 몸이 바로 잡히려면 마음이 따라주지 않고는 안 되고, 마음을 좌지우지하려면 몸부터 다스려져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둘로 나누어서, 몸은 어리석고, 마음 운운해야 지혜롭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십시오. 귀신은 道 닦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은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따지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