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7)
谷神不死

깨달은 사람은 산과 바다를 통하여 그 자리(自己)를 보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통하여 자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느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깨달음은 점점 더 깊어지게 되는데, 눈에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일이 깨달음의 동기(Motive)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 그리고 땅을 기는 저 벌레들을 보면서 나와 오버랩을 할 수 있다면 깨달음에 한발 다가선 것입니다. 저 하늘이, 흐르는 음악 소리가, 나와 하나라는 것이 느껴진다면 이미 확철대오에 이른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과연 제자들을 바로 가르쳤는지에 대해 나는 의심이 많이 갑니다. 지금의 힌두들은 불교(佛敎)를 힌두교의 일부라고 주장합니다. "도도히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튀어나온 한 방울의 물"이라고 폄하합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가 나온 곳이 그곳이고, 가르침 역시 힌두교와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입니다.선불교(禪佛敎)는 이름만 佛敎일 뿐, 시타르타의 원류라는 소승불교(小乘佛敎)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혜능(慧能)을 비롯한 중국의 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종교(宗敎)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도관(道觀)에서 사찰(寺刹)로 간판을 갈아붙이게 했고,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앉았던 자리에 석가모니를 앉혔을 뿐입니다. 경전(經典)들 역시 이미 정립된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그 용어(用語)들을 빌려 쓸 ..

요즘 부쩍 무당집을 차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한다. 대통령 손에 '王'자도 무당이 써줬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인신공양' 운운하는 말을 스스럼없게 잘도 한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당은 선악(善惡),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돈은 꽤 들어도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공한다고 믿게 한다. 그들이 영험(靈驗)한 이유는 따로 있다. 혹시 그가 써준 부적(符籍)으로 험한 일에서 벗어나면 그의 공(功)이 되고, 효험이 없으면 다시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니 말이다. 오래전, 효자동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름난 무당이 있었다. 지인(知人)이 그로부터 아들 이름을 감평 받았는데 불문곡직 개명(改名)을 권유받았다. 아니면 아들의 두 다리가 부러진다는 것이었다. 그 무당은 영험했다. ..

임시직으로 알바 정도를 하는 사람에게 책임 있는 직책을 주는 회사는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애사심(愛社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성의(誠意)를 가지고 있느냐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입에 바른말만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건강 유지 차원이 아니라, 소주천(小周天)까지 기대하는 사람은 무언가 달라야 한다. 그런 사람은 스승과 자기를 공동운명체로 생각한다.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仙道를 생각하고, 실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수련에 바치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등급이 된다. 불도(佛道)는 깨달음을 위해 세속(世俗)을 완전히 떠나기를 요구한다. 머리부터 깎고 옷부터 바꾸어 입힌다. 최소 1년 행자 생활을 지나 비구(比丘)가..

사람의 체온은 36.5도라고 배웠다. 그리고 전신적으로 평균을 유지해야 건강하다. 그것은 기혈(氣血)이 막힘없이 흐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35도가 되면 병에 노출되게 되며, 34도는 생명이 위험하다고 한다. 손발이 따듯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머리는 시원하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의 균형이 잡힌 바람직한 상태다.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될 약이 해열제이다. 생명력을 줄여주는 독약에 가깝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에서 열감(熱疳)을 자각(自覺)된다는 것은 병이 시작된다는 신호다. 상대적으로 내부(內臟)는 차가워지면서 기능 저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는 거미줄처럼 열전달시스템이 작동하는데 그 중 극히 일부에 장애가 생겨도 그대로 두면 전신적 문제로 이어져 결국은 좋..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 그것은 부모 자식 간, 친구 간이나 스승 제자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의심은 의심스런 일의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의심의 에너지는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가장 먼저 자기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그것에 따라 주변의 에너지가 변하기 때문이다. 늘 자기 관조(觀照)를 늦춰서는 안 된다. 믿음을 주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꼭 그릇 크기만큼만 받는다.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사람들은 이상도 하다. 스스로를 깨우치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의심없이 사이비 종교에 엎드리기를 좋아한다. 수행(修行)과 신앙(信仰)은 전적으로 다른 법임을 알아야 한다. 수행은 관심사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며, 신앙은 외부에 있는 알지 못할 그것이다. 사이비종교를 살펴보면, 처음엔 자기를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가공(假空)의 존재의 대리자라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은근슬쩍 자기가 그것(하느님, 天尊, 上帝)이라고 주장한다. 굳이 하느님이란 존재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야기의 말미가 하느님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원님 덕에 나팔 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관심사를 외부로 돌리지 말라.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사람이 하느님(..

“사람 둘과 기자 하나가 걸어간다”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맞다. 기자(記者)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매의 눈에 표범의 발톱을 가진 괴물이다. 그의 눈에는 돋보기와 졸보기 안경이 함께 달려 있고, 한번 물면 이가 다 빠져도 놓지 않는다. 물론 대강 권력자들과 결탁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기자도 적지 않지만.... 검사(檢事)에게 한 번 밉보이면 사돈에 팔촌까지 탈탈 털린다지만, 검사의 옷을 벗기는 것은 기자다. 그는 총보다 힘이 센 펜을 가지고 있다. 수행자는 기자와 같아야 한다. 그처럼 관찰력과 직감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알아채지 못하면 수행자가 아니다. 단번에 깨달을 것을 몇십 년을 끙끙대고 있는 것은 수행자로서의 자질(資質) 문제다. 기자라면 당장 책상 비우란 소리를 들을 것이다.

치매 환자의 웃지 못할 이야기다. 정신이 깜박깜박해 부인과 딸을 혼동(混同)하는 처지인데도 부인과 약속한 금요일 밤 사랑은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사(情事)를 마치고 나선 시작을 하려고 바지를 벗었는지, 마치고 났는지가 헷갈린다는 것이다. 아들딸은 몰라봐도 뜨개질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는 할머니도 있다. 내가 벌써 치매인지는 몰라도 계란이 필요해 냉장고 앞에 서선 내가 왜 그 앞에 섰는지 생각 안 나는 때가 너무 많다. 핸드폰을 서랍에 넣어두고 반나절을 찾을 때도 있고 ㅎㅎ 하지만 너무 감사하고 축복스러운 것이 있다. (자랑이다) 경전(經典) 구절은 늘 입에서 맴돌고, 눈만 감으면 바로 선정(禪定)에 든다는 것이다. 절대로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 버벅대지 않는다. 그리고 챙기지 않아도 임독맥(任督..

공력을 승격시키려 한다면, 스승이나 선배와 에너지의 동기화(同期化)가 필요하다.동기화란 서로 에너지를 조율해 비슷한 수준이 되도록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그렇게 되기 위해선 그와 삶을 바라보는 Code가 일치해야 한다.1. 스승의 말이 잘 납득이 되어야 하고, 2. 절대적인 신뢰로 3.스승의 Energy Field(氣場)에 편승해야 해야 한다.물론 상당 기간 정기적(定期的)인 기(氣)의 교류가 필요하다. 특히 소통과 신뢰가 필수적인데아무리 상대가 출중한 공력이 있다 할지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시도는 무의미하다.에너지 동기화는 물질적인 일만이 아니며, 영적(靈的) 차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