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7)
谷神不死

'삼매(三昧)'란 산스크리트어 Samadhi의 음역(音譯)이다. 사마디란 잡념을 버리고, 마음의 본래 자리를 찾으라는 말이다. 결코 정신을 어둡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세 가지 어두움(ㅋㅋ)이라고 직역(直譯)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망발(妄發)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을 어두움으로 이끄는 선생이란 이름의 마귀들이 있다. 그런 가르침 때문에 깨닫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다.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는 세상에 어두워지라니? 깨닫기 위해선 밝아져야 한다. 성인들마다 이구동성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지 않던가? 오해 없기를 바란다.

자기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경전(經典)을 끌어다 붙이고, 선지식(善知識)들 노래나 따라 부른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늑대가 어쩌다 호랑이 탈을 쓰고 있다 하여, 호랑이는 아닙니다. 토끼, 멧돼지가 나를 보고 도망간다 하여, 내가 호랑이는 아닙니다. 호랑이들이 나를 호랑이라 해줘야 비로소 호랑이인 것입니다. 혼자서 맥없이 깨달음을 과시한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살펴봐도 한점의 의심도 없어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세상에 누구도, 심지어 석가모니도 깨닫지 못했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 수 있습니다. 견성(見性)은 성(性)을 본 것(見)입니다. 性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 수 있겠습니까? 한국 다르고, 미국 다를 수 있겠습니까? 성품(性品..

시간(時間)이 없으면 공간(空間)도 없지만, 시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공간입니다. 공간이 없으면, 그것에 얹혀있는 모든 것은 신기루가 됩니다. 가만히 과거로 돌아가 보십시오. 거기에 당신의 첫사랑을 불러와 보십시오. 거기에 당신이 만났던 사람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10년 후로 가보십시오. 모양은 달라도 거기에도 사람과 사건이 있습니다. 시간은 생각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무너지면 거기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텅 비고 고요함만이 있습니다. 거기에 늘상 함께 있었으면서도 가늠하기는 어려운 영지(靈智)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진면목(眞面目)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단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비실재(非實在)일 뿐입니다.

마음의 바닥을 보지 못하면, 부귀영화도 한낱 꿈에 불과하다. 마음이 주인인 듯싶어도, 마음은 주체(自性)가 없이 인연 따라 흐르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모두라고 하지만, 그것이 꿈이고,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그것을 깨우쳤다 해도, 깨우친 자리에 대한 확연한 파악이 없어서는 갈증이 멎지 않는다. 그 깨우친 자리가 무엇의 도움을 얻어 꿈과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지에 무관심하다면, 평생을 닦아도 애물단지 하나 금고에 모셔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긴 생각(長考) 끝에 헛수(緩着) 둔다는 말처럼, 가장 간단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기(理氣)는 일원(一元)이란 말을 헛되이 듣지 말라! 세상에 에너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 주위에 머물며 자기 존..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을 내려놓으라' 했습니다. 우선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이것은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무엇인가 있으려면 이것이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상심입니다. 이것을 찾는답시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것은 한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어야 나는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이제 나는 누구입니까?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스승들은 에고를 내려놓으라 한다. 에고는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Epoche(판단정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가?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

모두가 착하다면, 거기에 착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운 것, 그리고 깨닫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진리(眞理)는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체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시각(視覺)이 편파 쪽으로 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自性)을 보게 된다. 수행자는 종일 자기를 살핀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중도(中道), 양쪽을 여의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있음이 없이 없음은 있을 수 없고, 있음 역시 홀로 있을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하지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은 것 중에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 더 큰 中道가 실현된다.

우리의 큰 괴로움 중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이다. 마음에 두던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을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좀 더 잘해줬다면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이 뜨면 몸도 뜬다.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나고 만다. 떠나기로 마음먹으면 그 이유만 열 개는 넘는다. 하지만 자기의 불찰로 떠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원인은 모두 상대에게 미루는 법이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친구 사이, 직장 동료, 그리고 스승 제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라"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의 첫 말(국가)을 남편, 아내, 친구, 직장, 그리고 스승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요약해서 결론을 먼저 밝히고, 그 뒤에 설명해주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먼저 제반 설명들을 지루하게 한 연후에 핵심을 말하는 화법이 있다. 나는 주로 전자(前者)를 택한다. 후자는 미로(迷路)를 헤매는 것 같아 우선 말하는 나부터 답답하다. "결론부터 간단히"를 대표하는 글은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단연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으뜸이다. "오온(五蘊)이 모두 텅 빈 것을 보고 일체의 고(苦)를 여의었다(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를 읽고 눈이 훤해졌던 기억이 있다. 나머진 사족(蛇足)이 아니던가? 그것도 길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화두로 삼아보라. 그야말로 말로만이 아닌 돈오(頓悟)를 바로 실감할 것이다.

열반(Nibbana)은 모든 불교도가 바라는 기독교의 천국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신비)의 경지, 즉 완전한 고(Suffering)의 해결 자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열반(涅槃)의 의미는 생명의 불이 꺼진 상태, 즉 소멸(消滅), 멸절(滅絶)이다. 시타르타의 깨달음은 "'나'라는 실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는 것이었다. '나 없음(無我)'을 불교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三法印)로 받아들인다. 시타르타는 그것을 알아챔으로 고민하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려놓고, 니체처럼 생각이란걸 해보자. 과연 그의 깨달음의 요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 또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죽어서 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