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천국을 말하지만, 기독교의 최종은 하느님 품에 들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극락을 말하지만, 불교의 최종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無常)을 알아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깨우치는 것이며, 선도(仙道)의 최종은 에너지(氣)와 하나가 되어 신선이 되는 것입니다. 길은 다르나 모두가 '나'의 근본을 찾는 일입니다. 난로 옆에 있으면 따뜻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난로만 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스승 역시 몸을 덮혀주는 난로일 뿐입니다. 최종은 자기 안을 생명 불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당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이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모른다면...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병사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란 것을 입으로만 외우고 있다면... 당신이 진정코 부처라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속성(屬性)을 지닌 그의 자녀(子女)이며, 그 하느님의 속성을 다른 말로 부처(Buddha)라고 한다는 것을 혹시 아시는지요?

E=mc^2 에너지는 질량(質量; 물체가 가진 物質의 양) 곱하기 빛의 속도의 제곱 빛의 속도의 제곱이란 물리학적 용어가 감은 안 잡히지만 에너지(E)는 질량을 증폭하는 가늠키 어려운 순수작용력이라 이해하면 어떨까? 짜장면 맛을 알려면 직접 먹어보면 된다. 그것을 알기 위해 밀가루의 성분은 무엇이며, 무슨 재료로 장(醬)을 섞어 만드는지는 몰라도 된다. 생명에 대해 알려면 氣(에너지)를 직접 체험해 보면 된다. 氣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된다. 어떻게 氣가 實 해지고, 어떻게 그것이 내 몸에 작용하는지만 실지로 느껴보면 된다. 그리고 의식과 어떻게 Mixing 되어 우리를 어디까지 진화시키는지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단, 짜장면 맛을 보려면 그것을 사 오거나 좋은 요리사가 있는 음식점을 찾아가는 최소한..

근세에 경허(鏡虛)만한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들 합니다. 불문(佛門)에 들어 대강백(大講伯)으로 이름을 떨쳤고, 속인(俗人)으로부터 전해진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야지(牛無鼻孔處)" 한마디에 대오(大悟)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해인총림(海印叢林)의 조실(祖室)이 되어 조선(朝鮮)의 선풍(禪風)을 되살리고,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등 역사에 남는 혁혁한 제자들을 길러냈다지요? 그랬던 그가 왜 술과 고기를 즐기는 파계(破戒)의 중노릇을 하다가 마침내는 불문(佛門)을 등지고 함경도 갑산(甲山)에 숨어 유인(孺人)으로 살았을까요? 그리고 왜 찾아온 애제자(愛弟子) 만공(滿空)에게도 자기의 사정을 알리지 않고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을까요? 내적(內的) 깨달음만으로는 그의 그릇을..

당신의 머리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마(達摩)가 혜가(慧可)를 눈밭에 세우고 스스로 팔을 잘라 바친 후에야 문을 열어준 이유도 그 정도가 아니라면 깨달음에 입문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에서 서울로 가려면 일단 방향이 동쪽을 향해야 한다. 아무리 지구가 둥굴다 해도 서쪽으로만 가서는 이번 생에 서울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정말 깨달음을 원한다면 깨달음 쪽으로 머리를 두라. 다시 말하지만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쉽다.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으니 말이다.

당신에겐 태극결을 외우지 않을 자유, 그리고 깨달음이나 소주천(小周天)에 대한 관심을 버릴 자유가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니라면 당장 멈추고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딱 심은 만큼 거둔다는 것, 그것만 이해하면 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것 역시 인생의 큰 숙제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서양철학자 포함)은 대부분 인생을 고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고(苦)와 낙(樂)이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게 낙은 거의 사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낙(樂)이다. 우리가 더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이 그리도 인생을 비관적(悲觀的)으로 보는 이유는 아직 실제적 본성(本性)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와 함께하는 순간, 苦도 樂도 없다. 그것들은 일어나는 당신의 생각이 그리 규정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苦가 일어나는 이유는 기운(氣運)의 흐름과 관계가 깊다. 기운의 운행만 원활하면 늙었어도 하루하루가 여유롭다. 작은 꽃 한 송이,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흐르는 시냇물도 그를 즐겁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하지 말라(Don’t think)'는 말은 잘못된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물은 선입감 없이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말 Just Look을 위해선 순수의식이 필요하다.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수(龍樹)의 중도(中道)가 빛난다. 그리고 방하착(放下著)이 새롭게 다가온다.

사소한 일에는 마음 쓰지 않고 살고 싶습니까? 최소한 내가 누군지는 알고 살고 싶습니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습니까? 이 지긋지긋한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살고 싶습니까? ☞ 그 Knowhow는 대학에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 오직 자성(自性)을 깨우쳐야만 합니다. * * * * * * 에너지가 부족하지 않게 살고 싶습니까? *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까? * 에너지를 운용하며 살고 싶습니까? ☞ 그것은 의사가 도와줄 수 없습니다. ☞ 에너지(氣) 공부를 시작하세요. - 세계선도(仙道)연맹 -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됩니다. 우선 눈에 보여지고 귀에 들리는 것, 눈과 귀, 보고 듣는 기능은 내가 아닙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라도 있으려면 내가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내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찾는답시고 별다른 짓을 하지 마십시오. 이해는 하지만, 여행도 떠나지 말고, 템플스테이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 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으며,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