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7)
谷神不死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내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나'라는 느낌, '나'라는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 변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나'란 말인가? 기억이 가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뇌가 만든 조작물(造作物)이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생생한 이것, 순간순간 알아채고 있는 이것, 바로 이것이 여래(如來) 자성(自性)이다. 자성(自性)은 한끝의 빈틈도 있어선 안 된다. 부정할래야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면, 이젠 그만 의심을 그쳐야 한다.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

직관력(直觀力)이 있는 사람은 빠른 결정을 내립니다.다소 오류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결국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은 그 입니다.그렇다고 그를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속도가 빠른 것입니다.직관력은 그에게 후회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서 다음 일을 진행 해 야 하기 때문입니다.누구나 직관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순수의식(純粹意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자리, 마음의 중심 자리에 머물겠다는 마음의 태도, 바로 그것이 직관력을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스승과 선생은 다릅니다. 선생은 알음알이를 주지만, 스승은 인생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연관된 자잘한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사 제1번은 각성(覺醒)이고, 두 번째는 에너지(氣) 운용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거나,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그를 만날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 깨달음처럼 쉬운 일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처럼 이상한 일은 없으니까요. 생명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승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받기 어려운 질문은, "하느님은 누가 창조했는가?"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이므로, '스스로 있는 분'이라고 하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는 답입니다. 조물주를 주장하는 한, 당연히 그를 만든 자도 있겠지요. '금강경'에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공표합니다. 그만이 가진 신통(神通)이 따로 있으며, 어떤 아라한보다 수승(殊勝)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점은 기독교의 주장과 불교는 거의 흡사합니다. 하나같이 신앙은 모순으로 버무린 비빔밥입니다. 교조(敎祖)는 어떠한 법(法)도 초월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당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길,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존재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몸이 당신인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이 당신인가? 저 산이, 저 시냇물 소리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당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러면... 생각(마음)이 '나'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배움은 말에서 시작하여 문자(文字)의 이해로 마무리된다. 문자는 사물을 이해하는 도구이며, 진리(眞理)로 통하는 창구이다. 그러므로 문자가 없는 세상은 거의 암흑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종교(宗敎)와 신앙(信仰)에 대한 문자 공부를 해보자. 혹시 종교와 신앙은 전혀 다른 말이란 것을 알고 있는가? 무식하게도 신앙인들은 자기의 믿음을 종교라고 부른다. 깨우쳐야 한다. 종교는 꼭대기(宗) 가르침(敎)이란 말이며, 신앙은 우러러(仰) 받들어 믿는(信)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랑과 평화이며, 신앙은 분열과 전쟁의 대명사가 된다.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고요한 정상(宗)에서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지만, 신앙인들은 결코 자기와 다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목숨 바쳐 다툰다. 그들은 매우 적..

인생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탄 여행과 같다. 그 수레를 모는 사람은 "나"이며, 몸과 마음이 두 마리의 말이다. 말 두 마리는 언제나 조화를 이루며 달려야 한다. 둘 중 한 마리가 다치거나 힘이 빠지면 마차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마차에는 늘 물과 양식이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氣)이 없으면 말들은 달리지 않는다. 게다가 주인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합니다. 신경(神經)도 보고 듣지 못하고, 뇌(腦) 역시 듣고 보지 못합니다. 듣고 보게 하는 놈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눈과 신경 뇌를 연결하여, 보고 듣게 만드는 작용(作用)이란 놈입니다. 그것이 느끼게 하고, 생각과 감정도 일으키고, 마음도 이리저리 운영합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진여(眞如),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고 그것을 여실(如實)히 깨우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무지(無知)한 사람이나 삶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는 그것을 알므로 주인으로 살고, 깨닫지 못한 이는 그것을 모르기에 노예처럼 삽니다. 깨달은 이는 가진 것이 적고 지위(地位)가 낮아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지만, 무지한 사람은 많은 재산(財産)에 지위가 높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