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7)
谷神不死

석가모니가 집을 나선 이유는 고(suffering)의 해결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 역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集)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소유이다. 선불교(禪佛敎)는 苦를 건너뛰어 자성(自性)을 알아채는 데 정성을 쏟는다. 자성을 깨우치는 순간, 苦는 붙을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석가와 맥(脈)을 같이 한다. 예수에 고착함으로 苦를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너스로 사후 천국까지 소망해 볼 수 있다. 불교가 나머지 모든 신앙들과 다른 것은 "나라는 것은 없다(無我)"이다. 그것으로 모든 고통이 무효가 되지만, 즐거움을 누릴 당체(當體) 역시 사라지고 만다. 선도의 특이한 점은 숭배의 대상(하느님, 부처)이 없다는 것이다. 몸(精), 에너지(氣), 그리고 의식(神)..

당신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는가?국어사전에서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하고 있다.1.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2. 대상(종교)에 대한 신자로서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는 마음 사실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므로, 믿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믿음이란 첫째로는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일이며,두 번째는 신앙조직에서 상정한 절대자를 대상으로 사용한다.하지만 신앙단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이 없으면 조직은 무너진다.보통 신앙과 종교를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무식의 소치이거나 자기 신앙에 대한 과포장이다.믿음처럼 모호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그것을 위해 목숨도 바치지만, 그것처럼 배신이 흔한 것도 없다.김기석 ..

경계(境界)를 따라가지 말고,생각을 하고 있는 그놈을 주시(注視)하라!눈이 눈을 볼 수 없듯,생각을 하고있는 그놈은 생각이 아니다.이 몸과 이 마음도 '나'는 아니고,십팔계(十八界)도 '나'는 아니다. 그것은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고, 느낌도 없고,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지만, 만상(萬象)을 나타나게 한다.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은 빛이요, 소리요, 에너지다.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 명예 그리고 학식(學識)에 생애를 바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것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이 "나"를 지켜주진 못한다. 단언컨,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것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 궁극적인 만족은 없다. 오직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통해 자기를 깨우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제서야 우리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세계를 떠나, 꺼지지 않는 만족,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닦아도, 지워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諸行無常), 언제나 여여(如如)한 것이 있다. 눈앞에 하느님과 부처가 나타나도, 시간 지나면 사라지지만, 오직 하나 항상(恒常)하는 것이 있다. 모양에 속지 말아야 한다. 보고 있는 그놈을 되비쳐 보라. 번뇌 망상을 없애려 하지 말라. 번뇌 망상이 없으면 그놈도 없다. 번뇌하고, 망상하는 그놈을 보라. 그놈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서장(書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선승(禪僧) 대혜(大慧)와 12세기 중국 최고의 지식인들과의 편지글입니다.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고위층입니다. 당시의 고위층들은 대단한 욕심쟁이들이었나 봅니다. 재물과 고위 관직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깨달음 공부에 관심을 보였으니 말입니다. 책을 읽으면 대혜의 지도로 그들 역시 자성(自性)을 깨우쳤음을 알게 됩니다. 요즘에 고위층분들이나 재계의 유력자가 자살하는 걸 보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역량을 더 발휘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진정한 자기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자살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은 세상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숭산(崇山)은 늘 "오직 모를 뿐"이라 했고, 공자(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 하였다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모른다는 이야기인가? 아는 척하지 말란 이야기인가? 노자(老子)는 간결하게 말한다. "모른다는 것을 알면 上의 사람이요,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를 세계 성인(聖人)이 되게 한 말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였다. 핵심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데 있다.

깨달음을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이라 하고,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도 합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단지 알아채기만(Realize) 하면 되니 말입니다.약간만 관심만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깨우칠 수 있지만 에너지가 약하면 세파(世波)에 휘둘리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이해한다 해도 에너지를 모르면 어두움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쉽습니다. 여태 나를 이끌며 살아 온 습(習)을 이겨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깨달음 이후 에너지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선도仙道는 그것(氣)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깨달음이란, 꿈을 깨고나니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이 헛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살아보니 70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꿈속처럼 도무지 가늠이 안 됩니다. 놓치고 싶지 않아도, 우리의 알음알이나 소유물들은 오래되지 않아 나를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온 적도 없고, 가지도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친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 조상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것이 죄(罪)가 되어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그 이야기는 모세가 기록했다는 다섯 편의 책 중 첫머리(창세기)에 적혀 있는 유대 나라의 신화(神話)입니다.《하느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먹지 말라.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그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복숭아라느니, 사과라느니, 주장이 분분합니다. 여자는 문제가 없었는데, 남자는 먹다가 목에 걸려 지금도 목 중앙(울대뼈; Adam's apple)이 불룩하다던가...뱀의 유혹에 빠져 먹었으므로 사과(巳果)라든가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