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깨우친 사람은 몸과 마음(생각, 감정)에 휘달리며 살지 않습니다. 늘 적절한 식사와 운동으로 몸에 효율성을 주고, 시간이 되는대로 고요함과 가까이합니다. 그것이 밝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을 알아채고 주도권을 다시 찾아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자기가 주인이라는 깊은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과(因果)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세상,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세상 말입니다. 그러나 밝음을 얻은 이는 인과에 너무 마음 쓰지 않고 삽니다. 그는 인과에 어둡지 않기 때문입니다. (不昧因果) 밝음을 얻었다는 것은 인과의 밑바탕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구름이 흘러가듯 모든 일에 초연합니다. 그저 道 속에서, 道만을 바라보며 살 뿐입니다. 좋은 일(布施)을 많이 하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좋고 나쁘고, 즐겁고 괴롭고, 주고 받고가 모두 한통속의 바탕에서 무상(無常)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늘 보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사에 감사합니다. 존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가지려 하고, 무언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언가를 가지려 하고,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그 주체(主體)"가 무엇인가에 관해선 관심 없습니다. 사실은 그것부터 알고 시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 보다는 무언가를 갖는 방법, 되는 방법만 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갖고, 원하던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아직 자기(自己)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그것(깨달음)을 위해 교회, 절을 찾고 고행(苦行)을 위해 미얀마, 히말라야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런 모양들이 그들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핵심에서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하늘이 열려 한없이 펼쳐지는 공간, 이 몸이 모두 녹아 우주와 하나가 되어 만상(萬相)이 모두 내 안에 들어오는 신비로움, 꽃비가 내리고 나를 반기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 신불(神佛)의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형용하기 어려운 포근함, 마음속 의문이 모두 무너져 내린 한갓지고 후련한 마음, 이어서 무슨 일도 가능할 것 같은 자신감. 오랫동안 자기를 바쳐 道를 간절히 구했던... 그런 배려라도 없다면 영영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우려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진통제와 같은 배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깨달음은 아닙니다. 온 것은 떠나가기 마련입니다. 체험의 감동 역시 그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한시적입니다. 하지만 유용합니다. 그런 체험이 계기가 되어 수행자를 가고, 또 가게 만들어, 결국은 不生不滅..
자기가 자기를 설득해야 합니다. 마치 행복을 스스로 선택하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나를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 스스로 설득되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타나도 불가능합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 고되고 힘든 일이 결국은 나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십시오.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은 그저 조건일 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은 결정됩니다. 돈과 권력이 행복일 수 있지만, 그것으로 평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질병과 가난, 외로움이 불행일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인생 후반부가 행복해진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자기를 설득하세요. 이 세상에 당신을 설득시킬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없을까? 목석(木石)도 스트레스가 있는데, 어찌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없겠습니까? 단지 그것에 밝아 그것으로 인한 고통이 없을 뿐입니다(不眛因果). 옛날 한 수행자의 공부를 돕는 보살이 있었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젊고 아리따운 딸에게 음식을 들려 암자(庵子)에 올려보내며, "식사를 마치면 그의 품에 안겨 지금 기분이 어떠시냐고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자 그 수행자는 말하길, "글쎄다? 나무를 안은 것도 같고, 돌을 안은 것과도 같구나" 했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보살은 화를 내며 그곳으로부터 그를 쫓아내고 암자마저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감(五感)을 가졌다는 것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우리는 스트레스를 겪으며 살게 마련입..
긴장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칩니다. 힘을 빼세요. 어깨에 힘을 빼세요. 눈에 힘을 빼세요.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몸의 힘을 빼면 마음도 느슨해집니다. 그것이 심령(Spirit)의 가난함입니다. 마음의 힘이 빠지면 그 자리가 보입니다. 쫓기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자리가 천국(天國)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마태 5:3) 애쓰지 마세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천국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認定)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인가(認可)만 필요합니다. 세상을 속여도 자기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善知識을 찾거나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은 스스로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1도만 부족해도 끓지 않습니다. 아직 99도라면 풀무질에 힘을 더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이 식어 버립니다. 50도, 40도로 내려가 버립니다. 알음알이를 일단 내려놓으십시오. 자만심과 체면을 버리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십시오. 몸을 뒤로 제끼고 있으면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가 났을 때 화난 감정을 알고 있는 무엇이 있다. 괴롭고 슬플 때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는 무엇이 있다. 외롭고 우울할 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놈이 분명히 있다. 화나고 우울한 것이 나인가? 그것을 알아채고 지켜보는 놈이 진짜 나인가? 날씨는 개었다가 흐렸다, 바람 불다가 비 오다, 이랬다저랬다 한다. 하지만 구름 위에는 일이 없다. 존재의 본 자리(純粹意識)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곳은 무중력(無重力)이다. 날씨에 민감한 사람이 있다. 해가 나도 걱정, 바람 불어도 걱정, 비가 와도 걱정이다. 몇 시간에서 며칠만 그러려니 하면 저절로 안정을 되찾을 것인데 말이다. 깨달은 자의 시간(時間)은 다르다. 그는 적어도 천년(千年)을 한 단위로 보고 산다(베드로후 3:8). 그의 공간(空間)은 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