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명상(Meditation)은 잠과 비슷하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 같아도, 알고 보면 생각을 보류하는 일일 뿐이다. 그것의 가짓수나 그것으로 인한 체험적 현상은 너무 다양하니 굳이 그것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자. 골치 아픈 일이 많거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명상이라 해도 과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자로 명상(冥想)을 어두울 冥, 생각 想으로 쓴다. 분별심을 내려놓는 데 유용한 것이니 "생각을 어둡게 하는 것'이라 해도 틀리진 않겠다. Medi란 중간(中間) 혹은 의료라고 해석된다. 그러니 생각을 중간에 두는 것, 그리고 요즘은 정신과에서 심리치료용으로 쓰고 있으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 수많은 신앙단체에서 그것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언어(言語)는 사람끼리의 약속입니다. 개를 하느님이라 부르기로 약속하면 그날부터 개는 하느님이 됩니다. 개벽(開闢)이란 Open & Open입니다. 모든 것이 열려, 더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을 "세상 끝", "천지개벽", 혹은 "아마겟돈"이라 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합니다. 그들끼리 그리 정한 거니 그들끼리 실컷 가지고 놀라고 그대로 두십시오. 그런 일은 새롭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시대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추종자들은 언제나 영육(靈肉)간에 착취당해 왔습니다. 언어에 휘둘리지 말고, 휘둘리는 그 당체(當體)가 누구인지에나 관심 두십시오. 그 자리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엄마 젖을 빨면서 "이것이 없으면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한 가뭄을 겪지 않으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無爲自然)에 의지하여 일하고, 재산 모으고, 번식하고, 잘난 척하며 살지만, 그 자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깨우침 얻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當然)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늘 그 자리 속에서 숨 쉬며 살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승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 하는 겁니다. 그는 늘 그 자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구원, 천국, 열반(涅槃) 해탈(解脫)은 모두가 그 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그네는 주막에 도착해 자기 허기(虛飢)만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말에게도 넉넉히 먹이를 줍니다. 자기만 밥을 먹고 말을 굶기면, 말이 움직이지 못해 부득이 여정(旅程)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리(理)이며, 말은 기(氣)입니다. 소식(消息)을 들었던 수행자들의 대부분이 낙오(落伍)하고 마는 것은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서입니다. 여행길에 말을 버리고 갈 수 없듯 이기(理氣)는 일원(一元)입니다. (氣發理乘) 한 소식을 했으면 그다음부턴 필히 氣 공부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무난히 공부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성공은 똑똑함과 부지런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조건들이 당신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 특히 조상신(祖上神)의 도움은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큰돈이 드는 제사(祭事)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들의 도움은 전적으로 당신의 말과 행동에 달려있다. 당신이 애써 자기를 업그레이드할 때 그들이 와서 돕는다. 당신과 그들은 하나다. 당신의 진보는 그들에게도 큰 기회다. 동시에 진보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최소 10%의 시간을 몸과 호흡, 그리고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으로 하자. 그때 그 자리에 당신의 조상신이 함께한다고 생각해라.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무엇보다 지금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Visualization)에 따라 모든 일은 시작되고 진행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천만번 외워도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하지만 보고 듣는 하나하나에 '도대체 누가 듣고 보는가?' 의문이 생긴다면 그는 상근기 중 상근기(上根器)이다. 마음속을 살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면 그는 깨달음이요, 단전(丹田)에 시원한 불꽃이 피는 것을 알아챘다면 신선(神仙) 세계가 코앞이라. 맛있는 곰탕 국물을 내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한 그릇 맛나게 퍼내는 것이 무슨 시간이 걸리랴! 깨달음이 그러하고 소주천(小周天)이 그러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시각화(視覺化)하면 그것은 잠재의식에 각인(刻印)되고, 그것은 그대로 실현된다. 실현되지 않는 것은 시기(時期)가 맞지 않거나 각인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는 반복해서 시각화하라. 특히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직후가 좋다. 그때는 우리 의식이 잠재의식과 가까이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시각화할 때는 허심(relaxed) 상태가 되어라. 전체의식과 가까이할 때, 원하는 그 일은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또한 “나는 생각하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별로 유명치 않은 말이 있다. 깨달음 자는 생각 없이 존재한다. 당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닦는다는 것은 씻어낸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 1. 일단 마음을 고요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 2. 자기에게 초점을 맞춰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알아채야 하고, 3.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관찰해야 하고, 4. 마지막으로 다시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데는 단전(丹田)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의수단전(意守丹田)이 으뜸이다. 丹田이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복식호흡과 함께 하복부 중앙에 마음을 두면 된다. 연습이 반복될수록 단전으로부터 에너지가 들고 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전은 생명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선도(仙道)는 단전으로 시작해, 단전으로 끝난다.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 사는 이유는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인생 전체가 허망(虛妄)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그것을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삶은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무나 바위, 개나 돼지와 다를 것이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흘러 지나간다. 오직 자성(自性)만이 거기에 여여(如如)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