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8)
谷神不死
仙道에는 '깨달음'이란 말이 없다. 단지 '소주천(小周天)'만을 강조한다. 선도의 모든 행법은 소주천을 向하고 있다. 소주천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전신(全身)의 에너지(氣) 타통과 부족함이 없는 넉넉함이요, 다른 하나는 실존(實存)을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이다. 仙道의 '개안(開眼)'이란 바로 알아차림의 회복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육안(肉眼), 즉 물질계를 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비 물질계, 절대계(絶對界)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인간이 영장(靈長)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안(靈眼; 神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견성(見性)이 불가능하며, 또한 얻어진 깨달음 역시 유지하기 어렵다. 안목(眼目)을 얻는 데 소주천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이 ..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理覺) (가고 가고 가면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면 진리를 깨우친다) 오래전, 봉우(鳳羽) 선생님이 전해준 글이며, 언제부턴가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去란 "가다"는 뜻과 "버린다", "내려놓다"는 뜻이 있다.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行이란 말은 관찰(觀察)한다는 뜻이다. 쉼 없이 관찰을 이어갈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천복(天福)을 타고난 사람이다. 칠십 평생 역경(逆境)도 많았지만 하늘은 그것을 고생(苦生)으로 생각 않고 살 수 있는 힘을 주셨고, 결정적 순간마다 가르침을 내리셨다. 여러 스승들로부터 서도(西道), 선도(仙道), 불도(佛道)를 두루 섭렵케 해주셨고, 마침내 성명(性命)을 깨우쳐 이루는 은총(恩寵..
선도(仙道)는 성명쌍수를 표방하여 견성과 득명을 겸행(兼行)한다. 견성이란 본성을 깨우치는 것으로 심제좌망(心制坐忘)의 행법을 통한 환지본처이며, 불가의 본성을 깨우치는 방편과 대동소이하다. 중국 불도의 좌선 수행은 그 시작에 좌망(莊子의 坐忘)을 채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득명(得命)은 글자 그대로 생명(生命)을 얻는 수련이다. 통상 性은 개체성을 가지지 않는 전체성을 지니므로 생명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생명은 개체성, 즉 인간성을 지녀야 하는데, 이것에서 인도가 시원(始源)인 불가(佛家)와 상당한 격차가 있다. 선인(仙人)은 열반(涅槃)에 들지 않는 보살(菩薩)과 같다. 신(神)이 기(氣)를 놓치지 않고, 氣가 神을 놓지 않는 상태가 득명이다. 보살사상과 신선사상은 일맥상통한다. 보..
조선시대 선비들의 다툼은 리(理)가 우선이냐, 기(氣)가 우선이냐 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자 없이 여자는 없으며,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氣가 理를 따르고 있든(理發氣隨), 理가 氣를 타고 있든(氣發理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역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각(自覺)을 이룰 때 사람들의 공통적 경험은 상당한 에너지(氣)의 체험이다. 그러나 관리(補任)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희미해지는데, 그것이 氣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에 에너지 없이 작동되는 일은 없다. 깨우침을 얻었던 사람이 다시 우매해져 재관(財官)을 밝히거나..
전생(前生)이고, 업장(業障)이고, 원죄고, 천당이고, 삼매(三昧)고, 구원이고, 해탈(解脫)이고, 다 문자 속, 생각 속 이야기 아니던가? 그 자리(本來面目)에 한번 푹 잠기고 나면 모두 끝나고 마는 것을...! 무념무상(無念無常)이고, 일상삼매(一相三昧)고, 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 헷갈리라고 만들어놓은 이야기 같고...! 세상사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고 영원한 것은 자성(自性)과 에너지(氣)뿐임을 알면, 공부는 끝난 것 아닌가? 공부하기는 다소 무식한 사람이 수월합니다. 그런 사람은 따지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용맹정진(勇猛精進)!
요리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출까지 써 가며 몇십 년 요리 연구를 하는 중에 얕은맛은 없어도 기운(氣運)이 돌아서 웬만한 병은 저절로 사라지며, 안목(眼目)도 열리는 신기한 음식을 개발해 냈답니다. 혼자 먹기 아까워서 사람들을 초대하여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지만, 반응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 시원치 않았다지요. 사람들은 달고, 맵고, 기름이 흐르는, 우선 입에 맞는 음식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답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초대하기를 중지하고 음식을 조금씩만 만들어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만 나누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애써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맛보기 음식을 한 접시씩 내준답니다. 그는 늘 편안하답니다. 음식 장사를 할 것은 아니니 손님이 적어도 행복하답니다. 그의 꿈은 우리가 경..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가치관에 대한 타인의 합리적 비판에 감사한다. 그것을 통해 내 생각의 오류를 바로잡고,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가치관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비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자기 속에 갇혀 아상(我相)만을 지키기에 급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자기보다 한 수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자기의 가치관을 내놓고 비판을 구해야 한다.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충고하기를 기피한다. 괜한 말로 그 사람과 척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문을 열어야 상대도 문을 여는 법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자기의 문부터 여는 태도, 그런 사람이야말로..
지관(止觀)을 알면 깨달음이 보인다. 깨달음에 이른다는 셀 수 없이 많은 방편(方便)이 있어도, 알고 보면 하나같이 모두 止觀으로 수렴(收斂)한다. 지(止)란 - 그치다, 멈추다 - 라는 뜻이며, 관(觀)이란 - 보이다,인식(認識)되다 - 라는 의미가 있다. 지와 관은 연기 관계이므로,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가 있으므로 관이 있고, 관이 있으므로 지가 있다. 그 둘은 편의상 그리 이름하였을 뿐이며, 사실상 그 둘은 하나다. 그러므로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름이 걷히면 저절로 태양이 드러나듯, 지는 그대로 관을 부른다. 망상(妄想)이 그치면 굳이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저절로 보이는 것이 자성(本性)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구조되어 ..
석가가 선정(禪定) 스승 휘하로 입문했던 이유는 집(集: attachment)을 내려놓는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集이 고통(suffering)을 가져온다는 것이 그가 사유한 결론이다. 결국 통찰 명상(Vipasana)을 창시하였는데, 이유는 집중 명상(Samatha)에 비해 깨어있기에 더 효과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생활에서 언제나 그 상태(Samadhi)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늘 마음 챙김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 역시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 선도(仙道)는 의수단전(意守丹田)을 통해 입정(入靜)한다. 그것이 타 수행법과의 차이이다. 丹田이 활성화되면 Anytime 깨어있음이 저절로(無爲) 일어난다. 특징은 에너지(氣)를 느끼며 수련한다는 것이다.
전신(全身)의 기운(氣運)이 통일을 찾게 되어 깊은 호흡(胎息)으로 이어지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채는 알음알이 모두(見聞覺知)가 그 자리로 연결됩니다. 그리되면 일상생활 모두를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비추며 살게 됩니다. 30년을 닦아야 비로소 안정을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운(氣運)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말이나 글에 따른 관념(觀念)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그 자리를 보았다면(見性), 그때 상당한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본인이 일부러 무관심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늘이 준 기회를 왜 흘려 버립니까? Mindfulness가 되면 저절로 전신이 기운에 휩싸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호흡과 연결하여야 합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숨과 하나가 되고 나면 그 후부터는 따로 챙기지 않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