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8)
谷神不死
마음은 가슴에 자리 잡고 있고, 신(神)은 눈과 함께 있다. 눈을 육안(肉眼)으로 한정 지어서는 안 된다. 들어도 보고, 맡아도 보고, 맛도 보고, 느껴도 보고, 알아차려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神)이라는 글자는 보일 시(示)로 시작한다. 실로 흥미롭지 않은가?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면 무엇을 나라고 해야할까? 간단히 없다(無我)고 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없다", "있다" 고 규정하는 그놈은 누구인가? 몸이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지만, 변함없이 지켜보는 그놈은 어찌할거나?
견성(見性)에 꼭 체험(體驗)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험이 있으면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누구는 구름이 걷히며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누구는 "꼬끼오" 닭 우는 소리에, 누구는 장작불이 튀는 것을 보면서, 누구는 스승이 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또 최근의 인터넷 카페의 누구는 기차에서 우연히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눈이 생기더니... 체험도 참으로 다양하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몇 번의 체험이 있었지만 그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가장 강렬했던 것은 오래 묵혀왔던 왼쪽 옆구리 기맥(氣脈)이 "스르렁"하며 열렸던 체험이다. 그때는 정말로 통 밑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봉우(鳳羽) 선생님의 직접 지도를 받고도 ..
예수는 "마음(心靈)이 가난하면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가르침이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무언가 잡동사니를 자꾸 거두어들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바른 견해(正見)"를 첫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입니다. 천국과 깨달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그대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선 축적된 지식들을 포함한 모든 생각들을 내려놔야 합니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깨닫기 어려운 것은 내려놓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신앙이란 놈은 흡착력이 강해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천국은 무슨 소용이며, 세상을 다 가진들 무슨 만족이 있겠습니까? 성인의 말..
운동은 젊음을 되살아나게 하지만, 노동은 노화(老化)를 촉진한다. 온몸을 골고루 기분 좋게 움직여 주는 것은 운동이지만, 특정 부위만을 힘들게 움직이면 노동이다. 문제는 근육과 관절을 얼마나 골고루 움직이냐에 달려있다. 그리하면 막혔던 기운(氣運)이 열린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臟器)까지 되살려낸다. 최소 일주일에 5번은 운동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쇠퇴(衰退)시킨다. 나는 늙어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다. 특별한 기구도 장소도 필요 없이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운동 말이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태극기공(太極氣功), 태극권(太極拳)이다. 단순히 건강만이 목적이라면 태극기공이 으뜸이다. 그러나 약간의 호신술(護身術)과 예술성(藝術性)이 필요하다면 태극권이다..
세상 모든 것에 등급이 있듯, 초능력에도 등급이 있다. 하급 초능력자는 과시하듯 초능력을 부린다. 마술과 구별이 어렵고, 보통 대중 앞에서 Show를 한다. 중급 초능력은 확실한 작용은 있으나, 작은 인간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意識)을 전환시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능력이다. 상급 초능력은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초능력이 아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계절이 바뀌듯, 꽃이 피듯, 그렇게 진행된다. 초능력은 Relax와 집중력, 그리고 시각화(Visualzation)에 의해 일어난다. 신선(神仙)도 등급이 있다. 몸을 가지고 속인(俗人)들과 함께 사는 신선을 인선(人仙)이라 한다. 인선이 육체를 벗으면 지선(地仙)이 된다. 그리되면 신(神)들과 동격(同格)이..
"침상에 누워 구질구질하게 죽고 싶진 않다. 바람 부는 벌판에서 나보다 한 수 높은 무사(武士)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일본의 한 武士가 한 말입니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바람 부는 벌판에 홀로 서야 합니다. 춥고 배고파야 합니다. 그러고는 가고, 또 가야 합니다. 깨달음은 양파 까기와 비슷합니다. 모양이 남아 있는 한 끝은 아닙니다. 벗기고, 끝까지 또 벗겨야 합니다. 불씨를 찾으세요. 그리고 그대 마음속에 불을 켜세요. 당신의 에너지를 확인하세요. 쉼 없이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우리는 실존(實存)한다. 우리는 변화하면서도 실존한다. 혹자는 "변화하는 것은 실존하지 못한다", "무엇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은 실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상호 세워 주면서도 존재를 유지하는 신비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實存이다.
내가 시작된 자리가 어디인지, 죽으면 어찌 되는지? 이 몸은 조만간 없어질 것이고, 생각과 감정은 출처도 없이 수시로 변하는 것이고, 숨(에너지)과 의식도 서로 분리되는 순간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이 과학의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영멸(永滅)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다. 반면에 선도는 영원으로 가는 완행열차다. 몸과 에너지와 의식의 공부이다. 하지만 애써 닦아야 하는 성가심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아는 것이 힘이지만, 경험 없는 알음알이는 "빛 좋은 개살구"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글로 적을 수 있어야 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 기(氣)의 실존을 아는 것으론 부족하다. 실제로 氣를 체험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氣를 체험하게 되는가를 아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실제로 가르침대로 따라 氣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되었을 때, 아는 것이 힘이 되고, 생명이 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마음이 일으킨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종종 우리는 전혀 살 생각이 없었는데도, 물건을 보는 순간 결제 카드를 꺼낸다. 전혀 마음이 없었는데 그 광고를 보는 순간,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된다. 사람들은 습관적인 삶에 길들어 있다. 그 타성(惰性)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진리뿐이다. 깨달음도 그러하고, 소주천(小周天)도 그렇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역시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수행자라면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스승이나 도반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서로 에너지를 교류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를 깨어있게 하는 요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