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수행이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수행은 자기를 아는 것이며, 스스로의 권리를 챙기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패턴을 갖는다. 수행자는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돈과 권력을 첫 번째 관심사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조작된 교리나 사상에 휩쓸리지 않아 혹세무민에 휘둘리지 않는다. 최고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므로 자기 정체성과 함께 불로장수가 주관심사이다. 장수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삶의 의미이자 인간이 가진 특권이다. 에너지 활용이 꼭 필요함을 숙지하고 있으며, 깨어있음과 건강 지킴에 시간 쓰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현인(賢人)으로 추앙받던 솔로몬은 山 같은 금은보화와 하늘을 찌르는 권력, 그리고 천하의 미색(美色)으로도 그의 마음을 달래지 못했고, 결국은 그가 섬기던 神으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그의 글(전도서 1:2)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합니다. 금강경(金剛經)의 달인(達人)을 자처하던 일본인 '에오(EO)'는 자살로 生을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허망론(虛妄論)으로 불교인(僧侶)들을 포함한 수많은 철학자들을 승복시켰기 때문일까요?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라는 詩나 "괜히 왔다 간다"는 묘비를 남긴 그들은 과연 깨달았을까요? 그들의 말처럼 인생은 허망(虛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에너지(氣)를 무시해..
물질(몸)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神)만이 최선이라 하지 말라. 그것들은 '내'가 아니다. 물질(돈) 우선의 사람을 저질이라 하고, 마음만 생각하는 사람을 사차원이라 한다. 몸과 마음의 중간에 氣가 있어 둘을 연결한다. 그리고 정기신(精氣神)이 구족되어야 산 사람(生者)이다. 우리가 기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기운이 없이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만 있는 것을 시체라 하고, 마음만 있으면 귀신이라 한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는 사람을 건강하다 하고, 기운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람을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한다.
"일체는 고(Suffering)이며, 모든 것은 고통으로 환원되고 만다"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불교가 주장하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부릅니다. 모든 일에는 그에 따른 보상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결국 손해(損害)이거나 손해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농사를 지으면 추수 때가 되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풍년이 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상을 맛본다면... 우리의 Mind가 그렇게 Setting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일의 어..
깨달음을 위해선 쓸데없는 인연(因緣)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의식주(衣食住)도 단순화해야 한다. 머릿속은 깨달음에 대한 기대로 채워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산다. 에너지는 깨달음을 위해 주로 사용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 가급적 묵언(默言) 생활이 바람직하다.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 생각지 말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말을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입속에 진언이 살아 움직인다면 생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살아서 무엇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를 늘 되새기라. 허망(虛妄)하지 않은 삶이 될 것이다.
'나'는 물과 같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존재한다. 고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낀다.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고, 느끼는 자는 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는 없다. 깨달을 것은 없다고? 그럼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한다. 내가 없다면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나는 물처럼 고정되지는 않았어도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있음은 보는 자가 있는 것이요, 들음이 있음은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 비행기 지나간 흔적이 있다는 것은 배와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물처럼 모양은 없어도, 엄연히 있다.
지식인(교수)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말하고, 지혜자(성인)는 어려운 내용도 상대의 눈높이를 따라 쉽게 말한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쉬운 이야기를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쉬운 이야기는 쉽게 듣고,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정리해 듣는 습관을 들이라.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가? 쉬운 것을 스스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하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 심폐기능이 좋아진다고 그들은 말한다.하지만 운동선수들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하고, 천수를 다하지 못하거나 여생을 어렵게 보내게 되는 것은 활성 산소 때문이다.달리기나 수영 같은 유산소 운동도 무리해서 헉헉거리게 되면 체내에 활성 산소가 폭발하고, 건강에 결코 이롭지 못하며 그것은 오히려 병을 부른다.운동은 해야 한다. 건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활성 산소와 무관한 운동이 있는가? 있다.가능한 대로 숨이 차지 않은 정도로 운동량을 조정하면 된다. 운동하는 중 안정적 호흡이 유지된다면 좋다. 숨차지 않지만 약간의 땀은 흘릴 수 있는 운동이라면 그것보다 건강에 유리한 운동은 없다. 그런 운동이 있는가?일단 걷기와 스트레칭 그리고 가벼운 자전거타기를 ..
"깨달음도 버려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버릴 것 역시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들은 하나, 사실은 얻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깨달아 있으므로 다시 깨달을 수는 없다. 이미 부처인데 어찌 다시 부처가 된단 말인가? 단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쓸데없는 의미 부여 하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기만 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빛이면 빛이고, 소리면 소리고, 느낌이면 느낄 뿐이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데, 무슨 버릴 것이 따로 있단 말인가?
실존주의(實存主義)란, '나'다운 나'를 만나는 시도이다. '나'다운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時空)에 구애받지 않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낸 것을 가리켜 "깨달음"이라 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선 본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들을 과감히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것, 몸과 마음 그리고 신앙 등등등... 부정이 무르익을 때, 오롯한 '나'다운 '내'가 출현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각(自覺)과 결단을 통해 '실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선 실천을 빼놓을 수 없다. 실존(實存)이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고통(Suffering) 또한 없다. 무아를 실존이라 주장하는 것은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