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6)
谷神不死
허리를 꼿꼿이 만들지 않는 이유 모든 운동에서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는 그 사람의 캐릭터(character)이다. 선도(仙道)에선 내단공(內丹功)을 닦을 때, 허리를 자연스럽게 하라고 가르친다. 그리하는 이유는 단전(丹田)에 힘이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다. 불교를 포함한 힌두(Hindu) 계열에서는 척추에 힘을 주어 꼿꼿이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리하는 이유는 쿤달리니(Kundalini)와 관계가 있다지만 과연 그것이 효과적인지는 의문이다. 선도(仙道)와 힌두 수행은 에너지의 시작점이 다르다. 선도는 丹田이 에너지의 발원점이지만, 힌두는 회음(會陰)을 중요시한다. 또한 선도는 기운을 회전(小周天)시켜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쿤달리니 행법은 상행하여 두정(頭頂)으로 쏘아내 브라흐만(Brahman)과 만..
에고가 순화되지 못한 공부자들 가운데 부정적인 정신 에너지로 타인에게 악영향을 주는데, 그것을 '방법'이라고 한다. 일단 그것(방법)에 걸려들면 정견(正見)을 얻거나 더 큰 에너지의 도움 없이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그 사람(단체)과 인연이 있는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영향 아래 있겠다는 의도다. 그 사람으로 비롯된 물건들은 아깝더라도 모두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이 부정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혹시 그 사람으로부터 얻은 주문(呪文)이나 받아 쓰던 이름을 아직 사용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 그 사람의 에너지(氣)권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악성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스승이 이끄는 정법(正法)을 닦는 커뮤니티에 들어가 ..
기계(AI)는 자기가 누군지에 관심이 없다. 감정이 없고, 생각도 없으며, 의지력도 없다. 그저 입력된 대로 심어진 기능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만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말 심각하게, 자기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정체성(正體性)은 본성(本性)으로 통하며, 그것을 아는 자를 불가(佛家)에선 '부처(Buddha)라고 한다. 지성인(知性人)이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면 "性을 아는 사람"이며, 여기에서 性이란 자기 本性을 가리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성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어영부영 살아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되기 위해선 관심의 초점을 그것에 맞춰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에고가 충족될 때, 그리고 추진하는 일이 순조로울 때, 몸에서는 사랑 호르몬(도파민, 엔도르핀, 세레토닌 등)이 분비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물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흘려버린다.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주고, 에너지의 압력을 높여 주는데 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했다. 사랑 호르몬이 생성될 때, 우리는 하느님이 된다. 수행자, 특히 선도인(仙道人)은 사랑 호르몬이 몸과 마음을 감쌀 때 놓치지 말고 호흡을 이용해 그 에너지(사랑 호르몬)를 단전(丹田)으로 보내야 한다. 그것은 잠자고 있는 단전(丹田)을 깨어나게 한다. 단전을 활성화시키는데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없는 것도 가져올 판에 가진 것을 왜 활용하지 않을까 보냐! 그것으로 단순히 ‘현타’에 빠지지 말고, 그것을 ..
선도(仙道) 공부에 뜻을 세운 사람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정관념에 젖어 있어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仙道는 에너지(氣) 공부이므로 모든 것을 에너지와 연관해서 생각해야 한다. 앉아서 호흡을 고르는 것만 가지고는 성통공완(成通功完) 에 이르기 어렵다. 이미 지닌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에 이기려면 육군만으론 어렵듯이 말이다. 소주천(小周天)에 뜻이 있다면 성적(性的)인 충동도 수련의 일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이미 심신(心身)이 식어 아무 감각이 없다면 노선(路線)을 갈아타야 한다. 접이불루(接而不漏), 즉 ‘접하되 설(泄)하지 말라’는 말은 금욕(禁欲)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당키 어려운 에너지를 연정화기(鍊精化氣)로 쓰라는 말이다..
성경(the Holy Bible)에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일반 생활인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라면 다르다. 재물에 신경을 쓰는 수행자는 추해진다. 경제를 내려 놓고 살지 못한다면 영적 성장은 어렵다. 과거의 수행자는 구걸로 연명했다. 비구란 거지란 뜻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필요한 것은 어디서든 충족된다. 요즘에 한국에 구걸하는수행자는 없다. 수행자의 기본 생활도 신청만 하면 정부가 보장한다. 수행자라면 관심사가 달라야 한다. 세상 모두를 얻었어도 미래를 잃었다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행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늘 자기 마음의 경향과 습관들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습관들을 과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엔 그것을 유지하고픈 핑계가 늘 자리 잡고 있다. 피해가 되는 일을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에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자기만의 핑계가 있다. 우리가 정견(正見)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해야 할 일은 당장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포기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에너지 새어나가는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선도수행자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에너지의 보존이다. 에너지를 낭비하는 마음, 태도 그리고 습관들을 바로잡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수행하는 흉내만 낼 뿐..
나는 수행자들에게 글을 써보라고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이 글쓰기이고, 자기와의 진솔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지키려 하는 성향이 있으며, 글은 그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우리가 계약서를 만드는 이유는 말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경전을 옮겨 적는 것을 사경(寫經)이라 한다. 그것은 읽는 것의 열 배, 백 배의 신뢰 효과가 있다. 하물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글로 나타낸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 글을 쓰자. 그리고 친구(도반)들과 서로 나누자. 그것보다 더 큰 보시는 세상에 드물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宗敎)이다. 부자든, 권력자든, 지식인이든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갈팡질팡하며 사는데, 그 이유는 '종교'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란 으뜸(宗)이 되는 가르침(敎)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으뜸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한다. 사람마다 으뜸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를 논(論)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이다. 보통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을 동의어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신앙(信仰)'이란, 믿어(信) 우러르는(仰) 것이다. 우리는 무엇도 신앙할 수 있다. 하늘 땅, 가공한 신(神)이나 돌부처에서 시작해 살인자, 마귀, 동물이..
의식(意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自我)이나 대상(세계)을 알아채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어지면, 나도, 세계도 없어진다. '깨어있다'는 말은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정견(正見)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식을 버려선 안 된다. 즉, 의식적(意識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사라졌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놈이 '나', 즉 의식이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이 깊어지면 단전과 나만 남게 된다. 물론 단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알아채면서 말이다. 알아채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가? 불교(佛敎)에서 멸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