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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의식(意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自我)이나 대상(세계)을 알아채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어지면, 나도, 세계도 없어진다. '깨어있다'는 말은 의식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이란 정견(正見)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식을 버려선 안 된다. 즉, 의식적(意識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사라졌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놈이 '나', 즉 의식이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이 깊어지면 단전과 나만 남게 된다. 물론 단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알아채면서 말이다. 알아채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가? 불교(佛敎)에서 멸진정(..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은 외롭고 우울할 사이가 없다. 그의 생각은 아이의 미래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인도 마찬가지다. 제자가 있는 사람은 낙오되기 어렵다. 그리고 뒤에서 미는 사람이 있어야 쉽게 앞으로 나아간다. 나이를 먹는지 모르다가도 아이 큰 것을 보고 비로소 자기의 현재 모습을 보게 된다. 진보하기를 원한다면 필히 제자를 두어야 한다. 부모의 재산은 손자를 보고 상속된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제자는 꼭 있어야 하는 존재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자가 있어야 공부 마무리가 가능하다. 큰 공부는 스승만 바라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제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승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말라. 이제..
새로운 것에는 도전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운 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실패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면(마음)에서 알리는 소리를 거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경험해 보지도 않은 미지적(未知的)인 일을 마치 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을 선험적(先驗的)이라 하는데, 수행자라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손익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를 던진다. 하지만 돈 벌고 출세하는 세상일에는 소질이 거의 없다. 그들의 마음속에 세상살이는 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만 신경 쓰면 돼. 병(病)이 오면 받아들이고 그냥 살아. 부처님도 앓다가 돌아가셨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생 문제없이... 병 없이 살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늘 건강관리 하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보시(布施)는 남에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이에게 이 몸과 마음도 외물(外物)이 아니던가요? 나하고 제일 가까운 이웃이지요. 사람은 몸이 아프면 에고는 더 강화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혹 에고가 정말 사라졌더라도 몸과 마음은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한동안은 몸과 이 지구에서 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말은 무성하지만.. 자기를 아는 사람은 너무 희귀(稀貴)하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몸이 부실하거나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선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운(氣運)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운이 없어도 그것은 사람이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자기 마음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사령관 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기운(氣運)도 '나'는 아니다. 그것들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 뒤에 그것들을 지켜보는 신령(神靈)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챙기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늘 그것과 함께하는 자를 가리켜 '깨달은 자' 혹은 '부처'라 한다. 그리고 기운까지 자유자재한 사람을 신선(神仙)이라 부..
마음이 우러나지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가 있듯이,그 좋은 사랑도 아무나는 못 합니다.누구나 청운(靑雲)의 꿈을 꾸지만, 뜻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단전호흡을 한다는 사람은 많아도, 단전(丹田)으로 호흡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군인이 수없이 많아도, 별을 다는 사람은 정해져 있듯이 말입니다.공부하겠다는 아이를 막을 길은 없지만, 공부 못할 이유를 찾는 사람을 공부시킬 도리는 없습니다.모든 일이 그러하지만, 스승의 도움 없이 연정화기(鍊精化氣)조차 어렵습니다.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살아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골반이나 무릎이 0.1도만 비틀려 있어도 틀린 길만 가기 때문이랍니다.자기를 세우지 마세요.자기를 죽이라는 말은 스승 앞에서 적용되는 말입니다.자기를 속이지 마십시..
삶의 중심에 소유(所有)를 두는 사람은 그것을 자아(自我)와 동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유의 갈증은 멈추지 않는데, 비교를 통해 가치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자아는 소유로 확인되므로 소유가 늘어나지 않으면 불안(不安)하다. 무소유의 삶이란 소유에 목매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소유물이 아니라, 늘 소유자, 즉 자기 자신에게 맞춰있다. 늘 깨어있음과 알아챔을 일상사로 하며, 에너지(氣)를 거두어들이고 그것을 운행해 심신(心身)을 충실하게 한다. 에너지 공부는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가는 필수적 요소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정기신(精氣神)의 통합이며, 그 중심에 기(氣)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남들과 공유한다. 그에게 부족함이나 불안, 두려움, 그리..
산 자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 기대이다. 과학 역시 그 뿌리에는 영생이 있다. 영생불사는 선도(仙道)에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이나 윤회 역시 생명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기피하는 이유는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잊혀짐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仙道를 말하면 보통은 장생불사를 생각하지만, 궁극적 목표는 영생불사(永生不死)이다.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인간은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이루며 살았다. 인간의 내면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 입장에서 몇십 년 정도 命을 더 잇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기독이나 힌두 등등 주류의 신앙 형태가 존재의 불멸을 가르치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죽음을 찬양하..
지혜로운 자의 태도 만년(萬年) 전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나 마음은 같다. 그 마음에 무엇이 덧입혀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캐릭터가 결정된다. 마음이 바뀌면 외모(外貌)도 바뀐다. 눈매가 바뀌고 피부가 바뀐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마음의 속성을 안 사람은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마음의 속성을 알고 그런 것으로 인정하고 살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바꾸려 하지 말라. 그대로 두고 바라만 보라.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다.
기(氣)는 이론도 교리도 아니며, 신앙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며, 작용력이다. 그것은 기독이나 불교처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약하면 몸과 마음도 약해지고, 그것이 다 하면 죽게 되는 것으로, 가장 소중하고 가까이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선도(仙道)의 차별성은 氣를 수행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氣는 몸과 마음을 연결해 작용들을 하게 돕는 것이다. 氣가 넉넉하고 잘 통하게 되면 건강해지고, 이어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아무나 氣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氣를 길러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없다. 각자 어떤 의미를 두고 사느냐가 삶의 의미다. 氣를 이해하고 그것을 닦아 부리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