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7)
谷神不死
세상에 무상(無常)처럼 멋진 것은 없다. 그것은 우리를 늘 새로움 속에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헌데, 그 無常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교리(敎理)가 있다.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이 허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無常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여가 만들어 낸다. 변화는 꼭 필요한 일이며, 그것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좋고, 궂은날은 궂은날대로 좋지 않은가? 쨍한 햇볕이 필요하기도 하고, 구름 낀 날이 좋은 경우도 있다. 삶에는 본래 의미(意味)가 없다.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다. 意味는 본인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므로, 일체는 본인 책임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사는 사람, 그에게 평온은 없다. 오매일여(寤寐一如) '나'는..
남자는 72세, 여자는 75세가 '건강수명'이란다. 보고에 의하면, 그 후 10여 년은 골골하면서 살다 간단다. 침상에 누워 100세를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 60을 살더라도 남의 도움 없이 살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건강 전문의가 건강수명을 지키는 네 가지 조건을 말했다. 첫째는 80세를 넘어서라, 둘째, 치매를 이겨내라, 셋째, 노화의 벽을 넘어서라 넷째, 약과 의사에 의존하지 말라는 누구나 아는 내용이었는데, 거기에 운동은 왜 빼놓았는지 궁금하다. 운동은 단순히 몸만 건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정신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이다. 하지만 최소 60이 되기 전에는 시작해야 한다. 아니면 힘도 들거니와 지속하기가 만만치 않다. 노..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실존(實存)이기 때문이다. 색(色)이 공(空)이든, 空이 色이든, 우리의 생각은 존재의 증거이다. 인생을 무의미하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배부른 돼지의 헛소리이다. 實存을 알려면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된다. 남들이 간다고 가지 말고, 믿는다고 맥 없이 따라 믿지 말라. 삶이란 도화지에 그림 그리기이다. 토끼를 그리든, 호랑이를 그리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는 자의 소관(所觀)이다. 삶의 의미를 묻지 말라. 삶의 의미는 정해진 것이 없으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면 생각도 불가능하다.
코마(Coma)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반응(反應)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 역시 기운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는 존재(神)에 에너지(氣)를 계합(契合)시키고, 그것으로 우리는 양신(陽神: 에너지체)을 이룹니다. 깨달았다 할지라도 에너지를 모르면 무용지물입니다. 보통 사람처럼 몸을 버리고 나면, 작용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소멸(涅槃)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온(色受想行識)을 '단순히 인연(因緣)의 집합일 뿐, 존재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에너지(氣)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연결되는 순간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의 핵심은 양신(養神)입니다. 양신을 위해서는 의수단전(意守丹田)이 필요하며, 그것은 의식(意識)과 에..
수행이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수행은 자기를 아는 것이며, 스스로의 권리를 챙기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패턴을 갖는다. 수행자는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돈과 권력을 첫 번째 관심사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조작된 교리나 사상에 휩쓸리지 않아 혹세무민에 휘둘리지 않는다. 최고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므로 자기 정체성과 함께 불로장수가 주관심사이다. 장수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삶의 의미이자 인간이 가진 특권이다. 에너지 활용이 꼭 필요함을 숙지하고 있으며, 깨어있음과 건강 지킴에 시간 쓰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현인(賢人)으로 추앙받던 솔로몬은 山 같은 금은보화와 하늘을 찌르는 권력, 그리고 천하의 미색(美色)으로도 그의 마음을 달래지 못했고, 결국은 그가 섬기던 神으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그의 글(전도서 1:2)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합니다. 금강경(金剛經)의 달인(達人)을 자처하던 일본인 '에오(EO)'는 자살로 生을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허망론(虛妄論)으로 불교인(僧侶)들을 포함한 수많은 철학자들을 승복시켰기 때문일까요?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라는 詩나 "괜히 왔다 간다"는 묘비를 남긴 그들은 과연 깨달았을까요? 그들의 말처럼 인생은 허망(虛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에너지(氣)를 무시해..
물질(몸)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神)만이 최선이라 하지 말라. 그것들은 '내'가 아니다. 물질(돈) 우선의 사람을 저질이라 하고, 마음만 생각하는 사람을 사차원이라 한다. 몸과 마음의 중간에 氣가 있어 둘을 연결한다. 그리고 정기신(精氣神)이 구족되어야 산 사람(生者)이다. 우리가 기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기운이 없이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만 있는 것을 시체라 하고, 마음만 있으면 귀신이라 한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는 사람을 건강하다 하고, 기운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람을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한다.
"일체는 고(Suffering)이며, 모든 것은 고통으로 환원되고 만다"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불교가 주장하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부릅니다. 모든 일에는 그에 따른 보상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결국 손해(損害)이거나 손해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농사를 지으면 추수 때가 되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풍년이 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상을 맛본다면... 우리의 Mind가 그렇게 Setting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일의 어..
깨달음을 위해선 쓸데없는 인연(因緣)들은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의식주(衣食住)도 단순화해야 한다. 머릿속은 깨달음에 대한 기대로 채워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산다. 에너지는 깨달음을 위해 주로 사용해야 한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 가급적 묵언(默言) 생활이 바람직하다.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 생각지 말라.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말을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입속에 진언이 살아 움직인다면 생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살아서 무엇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를 늘 되새기라. 허망(虛妄)하지 않은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