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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법(法)을 전하려면 견문(見聞)이 넓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서양 사람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구석방에 쭈그려 않은 고집탱이 할배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는 불교신자입니다. 불교 이외의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과학이나 에너지 같은 건 몰라도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냥 바탕자리 본래면목만 깨우쳐 몇십 년 지키고 있으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주장합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그런 주장조차 할 수 없을텐데 말입니다. 깨달음이 단지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나 봅니다. 깨달음도 버려야 하는 이치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대강백(大講伯)이요, 만공(滿空), 혜월(..
단전(丹田)이 열리면, 에너지(氣)의 본원(本源)과 계합(契合)된다는 것 외에도 생각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이 살아납니다. 수행자의 가장 큰 고민은 제어 안 되는 잡념(妄想)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부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흉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丹田은 꼭 회복시켜야 합니다. 잡념 제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려면 제일의 관심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데, 단전이 열릴 리가 없습니다. 丹田에 제일의 비중을 두어 공부한다면 반년이면 가능한 것이 단전활성화입니다. 물론 공력(功力)을 가진 바른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자기를 알아챈 사람(견성)에게는 외로움, 우울, 그리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겐 선악이 한통속입니다. 생각의 자유자재, 그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랜 습(習)으로 인해 가끔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깨달음이 있다면, 그런 것들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깨달음 역시 무르익어야 합니다. 세상일이 깨우치기만 했다고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仙道 깨달음의 특징은 에너지(氣)를 알아채고, 그것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운영해야만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소주천에도 급수(級數)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말하는 사람 중에 에너지(氣) 수련은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또한 자기의 우월함을 위해 타인을 폄하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깨우침과 에너지가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에너지가 없이 깨달음인들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에너지가 없으면 어리석게 헐뜯는 일인들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대상이 일어나야, 나도 일어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의존하며 완성되게 되어 있다. 볼트 하나만 빠져도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Recharge를 하지 않고 기계는 얼마나 더 오래 움직일 수 있을까? Smart phone도 매일 충전해 쓰고, 하루만 굶으면 죽겠다고 소리 지르면서 말이다.
깨달음을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이라 하고,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도 합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단지 돌아서기만(Realize) 하면 되니 말입니다. 약간만 관심만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깨우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약하면 세파(世波)에 휘둘리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이해한다 해도 에너지를 모르면 어두움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쉽습니다. 여태 나를 이끌며 살아 온 습(習)을 이겨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이후 에너지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선도仙道는 그것(氣)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깨달음은 낭만(浪漫)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현실(現實)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판타지(fantasy)가 아닙니다. 깨우침에서 초월적인 것, 환상적인 것을 찾지 마십시오. 깨달음은 시끌벅적한 난장(亂場)입니다. 깨달음은 꿈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서적이지도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은 피가 철철 흐르는 전쟁 마당입니다. 깨달음은 추억이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실 자체입니다. 죽은 이야기, 곰팡이 냄새나는 베껴온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한 치만 벗어나도 딴 동네서 놀게 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살아 펄펄 뛰는 "이것"입니다.
석가의 첫 출가(出家) 동기는 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병과 죽음을 본 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지위를 버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후 수많은 공부 여정(旅程)과 스승들을 통해 Samadhi(定)야말로 평화를 주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새 말로 명상(冥想)입니다. 그러나 최고봉(滅盡定)까지 힘들게 올랐지만, 일시적 평화를 줄 뿐, 지속적 안정(安定)을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그는 히말라야에 올라 수년간의 고행(苦行)으로 몸을 혹사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 였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샛별을 보고 깨쳤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혹자는 그동안 쌓은 수많은 공덕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단번에 꽃 피웠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말도 물론 일..
단전(丹田)이 늘 활성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느끼며 살려는 사람에겐 소식(小食)을 권한다. 배불리 먹으면 몸 안의 에너지가 우선 그쪽으로 밀려가기 때문이다. 술은 주량의 1/3만으로 만족하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 술, 담배는 내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나를 즐기게 해서는 안 된다. 수련을 하면서도 아직 술, 담배, 과식에 의존하고 사는 사람은 아직 마음속 정리가 덜 된 사람이다. 단전이 열렸다는 것은 깨달음과도 가까워졌다는 것이며, 그것이 온전히 활성화되면 밝음(見性)도 부족함 없이 찾아온다. 깨달음이란 사물을 안팎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하지만 밝음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도 시야의 대부분을 외부로 향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데 인색하다. 그것..
내가 지금까지 유튜브(YouTube) 동영상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신의 내부 시각(想像)을 묶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상의 고삐가 풀려 있어야 합니다. 직시(直視)는 마음의 그림 그리기(visualization)에 장애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고정관념을 넘어서 있습니다. 혹시라도 당신의 시각(vision)에 한계가 생기면, 당신은 그 그림의 울타리 속에 머물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마음대로 높이 날기를 원합니다. 깨달음은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YouTube를 활용해 마음 다스리는 Knowhow를 공개하겠지만 구체적 그림은 자제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상(像)은 변하고, 소리(聲)는 변하고, 느낌(觸)은 달라져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道, 혹은 作用力(Force)이라 하며, 세상 모두는 그것에 의해 펼쳐진다. 하지만 에너지(氣)가 없으면 그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에너지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작용력을 공(空), 성령(聖靈), 성품(性品), 무위자연(無爲自然) 혹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알아챈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작용하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없다(無我)"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주장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