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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큰 파급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시타르타의 "무아(無我)"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의 "연기(緣起)"라는 존재관(存在觀)에서 비롯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도 사실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논리(論理)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면, 일단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는 유아(唯我), 즉 진아(眞我)의 반증이 아닐까요? 죄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고 추궁하다 보면, 결국은 무죄(無罪)도 유죄(有罪)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
"나라는 것은 없다"를 주장하는 초기불교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을 비웃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더니, 결국 알아채는 '그놈' 역시 연기작용(緣起作用)이니 '나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론이 맞다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지요? 얻어들은 '무아(無我)'라는 문자에 너무 매인 것은 아닌가요? 그것 역시 말일 뿐인데 말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눈앞의 사실을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해 보려는 대표격 노인의 우왕좌왕하는 말투가 너무나 옹색해 보였습니다. 시타르타의 無我는 五蘊(色受想行識)의 당체가 비어(空)있다는 말입니다. 그 밀을 문자대로 "없다"라 해석하는 것은 空이란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가 아닐까..
벌판 끝 앞산이 제일 높은 山인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그 산에 오르려는 아이는 없었고, 형들은 그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했지만, 믿지 않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우리는 봄바람을 불어오는 산 너머에 누가 사는지 늘 궁금했다. 하루는 행방불명되었던 바보 '석두'가 산 너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앞산 뒤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긴 강이 있었고, 강을 건너면 앞산보다 훨씬 더 높은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석두 친구들이 용기를 내어 석두처럼 앞산 정상에 올랐는데, 석두 말처럼 눈앞에서 높은 산들을 보았다. "견성(見性)이 구경열반(究竟涅槃)이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혼..
내가 없는데, '내가 없다'는 말은 누가 하는가? 정말로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없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다. 없는 놈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입으로는 내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리다툼하고, 계율 어겨가며 재산 모으고, 축첩하고 노름에 골프치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이다. 그것도 별 직책을 가지지 않은 승려가 그리한다면 모를까, 최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면 그것을 일부가 저지르는 개인적 불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있으니 맛있는 것도 찾고, 남의 위에 서려 하고, 여자 구해 자식까지 보려고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있어야 나를 깨닫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없는 '나'가 왜 고(苦)에서 벗어나야 하고 없는 '나'가 왜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실로 황당한 일..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
말로만 '내가 없다'라고 한다고, 내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있습니다. 나에게 욕하는 소리가 개 짖는 소리로 들리고 송곳으로 찔러대도 아픈 줄을 몰라야 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고 배웠다고 내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나는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실존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입니다. 세상엔 그 문제를 해결한 두 분이 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두 분 중 하나는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생겨난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장 25, 26절) 아주 간단합니다. 믿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26절 끝에 말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타르타, 즉 부처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그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구구한 이야기는 빼겠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중심은 “나는 없다” 입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의 핵심 삼법인..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헛수고인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안 된다고 결론 내린 것을 혹시나 하며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10년을 사용한 지팡이에서 복숭아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왜 '진공묘유(眞空妙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만들어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이미 '없다(無我)'고 한 말을 번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싯다르타 앞에 엎드릴까? 그는 자기를 찾은 사람, 무(無)에서 유(有)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한다.
있음이 있지 않으면 없음이 있을 수 없다. 없음이 없이 있음이 있을 수 없듯이 ... 있음은 그저 여여(如如)하건만, 생각 좀 한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없음' 편에 선다. 그들이 주장하는 없음의 논리는,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매 이것도 있듯,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결국 그들 주장의 끝은 내(主體)가 없다는 것(無我)인데, 그렇다면 여기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붙이길, '공(空)'이라 하든, '허(虛)'라 하든, 여기 '이놈'이 없으면, 있음도 없음(無我)의 주장 자체도 없을텐데... 자가당착(自家撞着) 아닌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선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발가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이것'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