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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스나이퍼가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장애물 없이 타켓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깨달음(見性)을 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헷갈리다가 잘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깨달아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키워드 하나만 확실하면 연쇄해서 하나하나 풀린다. 1700 공안(公案) 중 하나가 열리면, 나머지가 모두 열린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단연 공안의 대표는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일 수밖에 없다. 무아(無我)니, 연기 중도니, 열반이니, 하는 4차원적인 말들은 나중에 살펴도 된다.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무상(無常)한 것, 시공(時空)에 묶여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제하여 본다..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지구에 있는 동안 빌려 쓰는 것이다. 빌려 쓰는 것이니 함부로 하지 말고, 잘 쓰다가 되돌려놔야 한다. '나는 없다(無我)'라는 주장이 있다. 일견(一見)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그 말은 몸과 마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평안을 준다. 그렇다면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그놈은 누구인가? 늘 몸과 마음을 지켜보던 그놈은 누구인가? 과연 몸과 마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왔던 원동력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원동력은 무엇에 근거해 존재하는가? 정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가? 선도(仙道)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 그 원동력을 기(氣)라고 하고, 氣는 의식(神)에 근거해 작용한다고 안다. 선..
수행이란 자기를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만을 세우지 않고, 내려놓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은 믿음이 아니므로 "나는 없다(無我)"는 말로 자기를 세뇌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하느님도, 부처도 없으며, 수행조차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수행이란 자기를 알아가는 여정(旅程)이다. 한 꺼풀, 한 꺼풀씩 자기를 벗겨,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다가간다. 그것을 불가(佛家)에선 "원래 부처가 부처임을 확인한다"고 하고, 선가(仙家)에선 "신선(神仙) 자리를 회복한다(回仙)"고 한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해탈(解脫)'이란,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설명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는 자가 없는 해탈은 무의미하다. '열반(涅槃)'은 해탈과는 다른 말이다. 열반은 죽음, 에너지의 불이 꺼진 상태, 원인이 무효가 된 상태 원래의 상태(無)로 돌아간 상태, 알아차리는 자 역시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해탈인가 열반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도(仙道)가 바라는 것은 해탈이다. 선도는 모든 일이 중심에 ‘내’가 있다. 선도는 무아(無我)를 말하지 않는다. 선도는 누군가를 신앙(信仰)하지도 않는다.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말로는 떡을 해서 천하 사람을 다 먹일 수 있습니다. 말로는 "내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 믿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내가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그리하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무아(無我)의 주장은 실제로 자기가 없어진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칠십 평생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리 말했다고 맥없이 따라 해선 곤란합니다. 그 논리(論理)는 허구(虛構)입니다. 마치 마약(痲藥)과 같습니다.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한 말입니다. 정말 내가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
불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부정한다. '자아(自我)'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비판(批判) 없이 그것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자기를 '없다'고 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석가의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敎理)에 근거한다. 과연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는 연기(緣起)하는 것이 맞고, 다분히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론상(理論上)으로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에고(자아)'를 죽여야 하고, 무아(無我) 교리를 따라,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념무상(無常)을 체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
태어나는 순간, 생존 의식 외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생존을 위해 더 유리한 것만을 구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생각과 행동 역시 그것에 의해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젖을 빠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 일은 평생동안 지속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무엇이 지금의 나에게 더 유리한가에 기초하여 그에 준한 말과 행동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신앙이란 것도 별것이 아니다. 신앙 행태를 보라.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외칠지 몰라도, 그 뒤를 보면 이기주의와 반목, 폭력이 난무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믿음이 다소 제 자리를 찾기도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진리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선사(禪師)는 "이것뿐"이라는 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고(苦)로 점철된 일상생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다는 뜻은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부언하였고, 그것을 이해하므로 모든 고통을 넘어선다(度一切苦厄)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空이란 말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헛것" 내지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하면 삶이 허망(虛妄)해집니다. 空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여도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의 조화에 의해 세상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일어나고 꺼집니다. "어떤 法도 세우지 마라. 오직 中道"를 설파하던 인사(人師)도 배고픈 것 못 참고, 독감 걸리면 "아이구, 죽겠다" 합니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은 관념(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