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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그 말을 한 그 사람을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생각을 안 하고 멍하니 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요즘 유행하는 멍때리는 것은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아닌가?참선이나 명상 같은 것들 말이다.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무아(無我)를 입버릇처럼 되뇐다.그 말은 곧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 無我를 말하면서도 생각도 하고, 화도 내고, 탐욕도 일으킨다.참으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나는 無我를 반대하는 사람이다.그것을 믿는 사람이 수억 명이고 위대하다는 성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내가 존재하는 근거는, ..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를 아시는지요? 속아서 정신병 환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들 말만 듣고 어찌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반면에, 엄연한 자기를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먹고, 자고, 이것저것을 소유하려 하면서 말입니다 누구라도 하루만 굶어보면 압니다.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옷 입지 않고 5분만 거리에 나서 보면 압니다. 과연 자기가 허깨비 같은 존재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는 진짜 이 몸과 마음이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중생들이 너무나 자기에만 집착하느라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안쓰러워 한 말일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도 속았는지 모르고 말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이 실재(實在)한다면, 그의 뜻을 따라 살면 될 것이다.간단한 일이다.하지만 그가 있는지 또한 그의 뜻은 알 수 없다.사람마다 다르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면,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다.무언가를 믿을 필요도, 애써 수행할 필요도 역시 없다. 문제는 '나'라는 것이 있을 때 생긴다. 그때 우리는 복잡해진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거기서 수행(修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몸과 마음, 그리고 그 둘을 작동시키는 에너지(氣)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정기신(精氣神)이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일정 시간 살고 마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각자 좋은 대로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이기 때..
유(有)가 없이 무(無)는 존재할 수 없다. 무는 유를 근거로 존재하며, 절대무(絶對無)에서는 무를 알아차릴 근거조차 없기 때문이다.무를 주장하기 위해서 유를 삭제할지라도, 그곳엔 유의 흔적이 남아 유를 증명한다.'무아(無我)'란 싯다르타가 만든 다분히 조작적인 말이다.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내가 있는 한, 고(苦)는 영원히 존재한다.고와 낙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한 말이다.아무리 無我를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나(自我)'는 존재한다.無我 역시 내가 있어야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絶對無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한, 그 뒤엔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내'가 있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불교의 핵심을 말하자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싯다르타 깨달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라문교(힌두교)는 유신론이다. 창조,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삼주신(Trimurty로서 Brahma, Vishunu, Shiva)을 신앙하며, 개체적 자아인 Atman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Brahman과 합해지는 것을 최종적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 신앙 체계를 뒤엎은 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 체계는 거의가 無我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승(大乘)이 출현하며 힌두의 윤회까지 받아들이더니, 無我가 진아(眞我)라는 해괴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부처의 가르침인 無我를 부정할 수는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무아(無我)'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知性人)이라 한다. '나'는 정기신(精氣神), 즉 육체와 에너지(氣) 그리고 정신(의식)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쉼 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나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없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표할 만한 것은 '의식(意識)'이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나의 가치이며, 그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할 이유다. 의식은 공부량에 따라 진보하며 영원한 존재다. 그것은 육체가 흩어져도 에너지가 끊겨도 없어지지 않는다. 살아서 몸과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
깨달음이란 즉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단지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교리(敎理)가 아니며, 배우거나 믿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학문으로 덮으려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리를 틀고 앉을 필요도 없고, 가족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무아(無我)도 아니고, 참나(眞我)도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아(無我)니, 진아(眞我)니, 따지는 것부터 깨닫기 싫은 핑계입니다. 깨달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만났다..
'무아(無我)'를 믿고 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아주 곤란할 것이다. 일단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자기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나 없음'이 증명될 것이니 말이다. 재물과 권력, 명예 정도를 양도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 그리고 자기주장과 믿음까지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내가 숨 쉬며 살아있기 때문에... 주장을 할 때도 거기엔 '내'가 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걸 알고, 졸리면 졸린 줄 알고, 죽비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바로 '그놈' 말이다. 이른바 '참나', 즉 진아(眞我)라 부르는 그놈, 우리가 깨닫기가 어려운 이유는 없는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생긴 적도 없었고, 사라지지도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