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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깨달음이 正見

thedaywemet 2018. 11. 26. 12:39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詩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결말을 보려면 그 시작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는 가을부터 내년 농사를 생각하고,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가는 기초공사부터 든든히 합니다.


수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八正道의 첫 번째는 '正見'입니다. 하지만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초발심자에게서 바른 견해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견해는 아직 俗世의 시각(視覺)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식(正式)으로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최소한 1년 정도 行者로서 힘들게 나무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동안 선배들 밑에서 과거의 가치관들을 정리하고, 수행에 입각한 바른 시각과 바른 견해를 익힐 것입니다.


상당한 부딪침이 없을 수 없겠지요.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는 시각 차이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도저히 견해 차이를 조율할 수 없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이 흔히 쓰였을 겁니다.


佛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仙道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仙道 닦기가 佛道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소견입니다. 기초를 정리하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추구하는 바가 반은 世間的이고, 반은 出世間인 데서 상당한 오해도 생길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적당히 해석해 넘기기 때문입니다.


仙人은 "神仙과 사람"의 혼합어로서 大乘의 보살(菩薩)과 의미가 거의 같습니다. 알다시피 보살이란 'Bodhi-sattva'의 音寫로서 부처와 衆生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大乘에는 '육바라밀'이라도 있지만, 오늘날의 仙道는 아예 계율(戒律)이란 의미조차 희미하기에 어려움이 더 큽니다. 각자 良心에 의존하여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기에 십상이고, 씻었어도 세상 물 다시 들기 쉽고, 게을러지기 쉽고, 우선순위에 혼돈이 오기 쉽고, 無記空에 빠지기 쉽고, 이론보다 실 체험 풍부한 유능한 스승 만나기 어렵고...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무엇 하나 그리 호락호락 하답니까?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엉뚱한 생각이 날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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